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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1)
수선화에게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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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아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시가 내게로 왔다 28p>

 

 

 

고등학교 시절 거울을 봤다. 여드름 많고 퉁퉁한 얼굴 하나가 있었다. 웬만한 나르시시스트도 참지 못할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난 연애를 하지 못할 거야.

하더라도 매우 확률이 적을 거야.

그 확률을 뚫더라도 나를 뽑아먹을 여자를 만나겠지.

적은 확률, 그마저도 나쁜 의미로 특별해질 내 연애 미래를 난 포기했다. 미친놈처럼 발버둥 치느니 차라리 익사를 선택했다. 진짜 익사와 연애 익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연애를 포기한다고 실제로 질식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짜잔. 절대란 없었다. 연애를 포기한 내 의지는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다정한 커플들과 쓰라린 가을바람에 무너졌다. 절망. 절망스러웠다. 나는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르처럼 하늘을 원망했다. 소망을 줬으면 능력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능력을 안 줄 거면 소망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던가. 못생긴 얼굴과 어마어마한 뱃살 둘레와 모자란 가정 형편을 주었으면 깔끔하게 연애를 포기해야 맞다. 그런데 내 마음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중독과 같은 열정이 후세를 남기려는 진화 과정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진화의 표본일 것이다.

 

외모로도 연애 자세로도 박물관에 처박히는 꼴이 더 나은 나는 떠돌았다. 이따금 가족 모두 잠든 밤에 눈물을 흘렸다. 친구들은 키라도 크네라면서 등만 떠밀었다. 연애는 태어날 때부터 상실한 신체 부위처럼 느껴졌다. 키스, 애무, 성관계는 중세 시대에 명맥이 끊긴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들렸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늘어놓는 자랑을 그저 끄덕거리며 듣듯이 나는 텔레비전 속 연애담을 들었다. 사랑은 꽃이다, 사랑은 지하철이다, 사랑은 인터넷이다. 그래 지하철 타보고 인터넷 해봐서 좋겠다, 새끼들아.

 

<수선화에게>는 내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때에 읽은 시다. 읽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시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선화에게>는 그저 나를 위로했다. 내 손을 잡아주면서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다. 저 시에서 말하는 외로움이 모든 인간이 느끼는 철학적인 외로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 외로움이더라도 상관없다. 그냥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대상이 포르노와 걸그룹 직캠 이외에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도 나는 저 시를 읽으면 살짝 놀란다. 평소 외로워하는 타인을 만나면 조금 꼴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선화에게>를 읽으면 전혀 물귀신 마인드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고 정감이 간다. 눈 내린 날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이불 속에서 휴일을 즐기는 것 같다. 나 같은 놈도 포근하게 만드는 것. 그게 시의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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