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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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25)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감상 (노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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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까지는 프로레슬링을 열심히 봤습니다. 어느 프로레슬링이냐 물으신다면, 자연히 WWE 프로레슬링이겠죠. 한때,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프로레슬링 열풍이 불었죠. 그때는 보지 않다가 뒤늦게 빠져버린 겁니다. 저는 후회했죠. 이왕이면 더락, 헐크 호건, 트리플 H, 골드버그, 바티스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날뛰던 2000년대 초반 WWE에 빠질걸 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본 최근 WWE도 재밌었습니다.


  압니다. 프로레슬링은 각본이죠. 누가 붙고 누가 이길지 다 정해진 싸움입니다. 관객과 시청자도 어린이들을 제외하면 이 사실을 압니다. 그럼에도 재밌습니다. 영화도 다 시나리오지만 재밌잖아요? 프로레슬링 회사는 이 정해진 싸움을 차근차근 만들어갑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게 하고, 둘은 각자 상대를 폄하하고 욕합니다. 그러다 한 번 만나 투닥거리면, 옳다구나 하고 몇 주 후에 있을 이벤트에 매치를 잡아 줍니다. 레슬러가 거물이거나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경기일수록 이런 준비과정은 더 길고 묵직합니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는 보는 내내 프로레슬링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싸우는 레슬러가 사람이 아니라 CG로 만든 거대괴수였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일본 원작 고질라는 보지 못했습니다. 98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고질라, 2014년 가렛 에드워즈 감독 고질라만 봤습니다. 일본 원작은 못 봤지만, 팬들 말을 들으니 14년과 이번 작품이 더 일본 고질라에 가깝더다군요. 에머리히 감독 고질라는 헐리우드식 재난물입니다. 괴물이 나타나고 건물이 박살나고 군대는 실패하고 주인공이 도와 겨우 이겨냅니다. 이런 영화가 관객 머리에 심는 제1목표는 '어떻게 물리칠까?'거나 '어떻게 살아남을까?'겠죠. 그 사이에 뉴욕의 역사 깊은 빌딩들이 박살나는 모습으로 눈요기를 하고요.


  14년 고질라에서도 주인공은 고질라를 없애려 합니다. 그건 고질라의 정체를 모를 때 이야기죠. 애초에 핵을 맞고도 사는 괴물을 인간이 어떻게 죽입니까? 고질라의 포지션은 영화가 진행되며 바뀝니다. 다른 괴물이 나타나고, 마지막엔 고질라가 괴물과 싸워 인류를 지켜냅니다. 고질라가 인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을 지키는 게 일이기 때문입니다. 괴물 죽이러 가는 길에 빌딩이 있든 사람이 있든 아랑곳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고질라는 지구의 균형을 맞추는 수호자가 됩니다. 인류의 수호자가 아니라. 아무리 인간이 날뛰어도 '어쩌라고' 하는 식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그래서 '너네 인간도 조심해'라고 간접 경고하는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질서를 위한다는 점에서는 타노스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죠.


  전작에서 고질라가 '나쁜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다 부수지만 시크한 수호자'로 거듭난 덕분에 이번 후속작에서 고질라는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데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질라는 아직 인간이 고깝고 인간은 아직 고질라를 무서워하지만 아슬아슬한 공생을 유지합니다. '어휴 짜식들아 이것도 못 죽이냐'는 식으로 고질라는 괴물들과 싸웁니다. 영화다 보니 이기거나 무승부가 나고, 밀리기도 하죠. 스포일러라 말하진 않겠지만. 전작은 고질라와 비교해 개미보다 작은 인간이 바라본 고질라를 보여준다면, 이번작은 꽤 높은 시점에서 보여줍니다. 괴물들이 싸우는데 당연히 중계화면을 잘 잡아야 되겠죠. 전작에서 보여준 묵직함, 거대함은 줄었지만 실제 크기가 줄어든 건 아닙니다. 빌딩은 누네띠네처럼 부서지는데 98년 영화처럼 '와! 뉴욕 빌딩이 무너진다! 무섭지!' 같은 의도는 담기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시크하게 부서집니다. 이런 시크함이 저는 좋습니다. 대도시를 일부러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싸우는데 하필 그곳이 대도시인 것. 악당보다 재해에 가까운 고질라는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질라와 인간 사이 관계는 전작보다 깊습니다. CG기술이 발달한 건지, 제작진이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지는 모르나 고질라는 전작에 비해 더 사람 같습니다. 행동이 더 다양해졌다는 말입니다. 전작에선 움직이는 산 같았다면 이번엔 걸어다니는 거인 느낌이 더 들죠. 그래도 고질라가 죽은 주인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따위는 안 나오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이야 실망스럽지만, 영화관에서는 고질라의 그런 츤데레가 조금 맘에 들었습니다. 일반 관객한테도 그쪽이 더 어필되겠죠. 제가 박스오피스를 걱정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영화는 괴수 파트와 인간 파트로 나뉩니다. 이건 제가 아니라 많은 분이 나누는 기준입니다. 보기에도 뚜렷하죠. 배우는 세트장에서 찍고 괴수는 컴퓨터 그래픽 속에서 찍으니(CG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가 인간 부분이 어색하고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비판합니다. 소신껏 말하자면 전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 인간 파트는 적어도 괴수 파트를 방해하진 않았습니다. 등장인물이 무의미한 짓을 좀 하고 헐리우드식 농담 따먹기(피식 웃지도 않을)가 집중을 깨뜨리긴 합니다. 그래도 자기 임무는 잘 수행했습니다. 임무란 바로 괴수 파트 사이 징검다리가 되는 일이죠. "괴물의 신호가 XX에서 잡혔다!" 그럼 우린 괴수가 XX를 박살내는 장면을 기다리면 됩니다. "이 괴물의 약점은 YY야!" 왜냐고요?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알면 됩니다. 러닝타임 전체를 괴수 싸움으로 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을 주역으로 만들 수도 없는 각본가들은 그나마 준수한 드라마를 써 냈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볼 때는 드라마를 스킵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싸움. 이 싸움 장면은 영화 전체를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프로레슬링 회사가 몇 달에 걸쳐 쌓아올린 노력이 하룻밤 경기에서 터지듯, 고질라는 모든 것을 걸고 대판 싸웁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잘 만들었습니다. 괴수물 팬이라면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래도 좀 긴 싸움을 보고 싶었어요. CG가 돈이 많이 든다는 건 알지만요. 화면전환 없는 노컷 3분, 고질라와 괴수 대격돌! 이거 하나면 고질라 역사의 명장면으로 남을 겁니다.


  인간 측 주인공을 맡은 카일 챈들러는 피터 잭슨의 킹콩에도 나왔으니, 킹콩과 고질라를 둘 다 본 셈이군요. 아역으로 나온 밀리 바비 브라운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유명하다는데, 전 넷플릭스를 안 봐서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쪽이 더 주인공 같아요. 귀엽습니다. 지금도 성공했지만 앞으로 대성할 느낌이 듭니다. 킹콩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콩은 도대체 어떻게 얘랑 싸운답니까? 크기야 성장해서 맞추면 된다지만 핵무기도 소용 없는 괴수를 어떻게 이긴다는 거죠?





  아무튼 98년 '질라'나 괴물 물리치는 블록버스터를 기대한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14년 고질라를 안 보셨다면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스토리는 크게 상관 없지만, 전작에서 쌓은 분위기를 물려받으니까요. 어차피 이제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고질라 관이 속속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질라보다 몇만 배 작은 '기생충'이 메우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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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 제네시스(Library Genesis), 정보의 검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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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도서관 컴퓨터를 들어갔다 이상한 사이트를 찾았다. 크롬 새 탭을 열면 구글 검색창 밑에 여러 사이트가 나온다. 원래 네이버나 G메일 등이 자리잡은 그곳에 처음 보는 사이트가 있었다. Library Genesis라는 사이트였다. 혹시나 해서 모든 사이트에서 로그아웃한 후 접속했다. 들어가며 사이트 이름을 다시 생각했다. 직역하면 '도서관 창세기'가 된다. 창세기가 들어갔으니 종교 관련 사이트지 싶었다. 앞에 Library가 있으니 창세기 관련 서적을 모아놓은 사이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라이브러리 제네시스는 그보다 더 중대한 사이트다.





  척 보기에는 단순하다. 야한 그림이나 괴상한 광고 배너도 없다. 검색창과 메뉴만 덩그러니 있다. 속은 다르다. 사실 라이브러리 제네시스는 불법 도서 스캔본 공유 사이트다.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가입하거나 포인트를 쌓을 필요도 없다. 이렇게 쓰니 광고처럼 들리지만, 이렇듯 너무나 간단히 저작권을 어길 수 있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나 기타 글에 따르면, 라이브러리 제네시스는 학술 쪽으로 자료가 많다고 한다. 아마 출판물을 보고 싶은 연구자나 대학교재 솔루션을 원하는 대학생이 자주 이용한다는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요즘 사서 읽는 '돌파력'(Obstacle is the Way)을 검색했다. 1초도 되지 않아 자료가 나왔다. 몇 번 클릭하니 바로 pdf가 다운로드되었다. 알약으로 검사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실행하니 그 안은 실제 책이었다. 텍스트는 아니었고 스캔본이었다. 물론 확인하고 바로 삭제했다. 검색 메뉴로 돌아가니 라이브젠뿐 아니라 과학 기사, 픽션, 만화, 잡지 등이 있었다. 아까 돌파력을 검색해 들어가니 여러 미러 사이트들이 나온 것을 생각하면, 다른 사이트들 자료도 같이 검색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졸지에 정보의 바다를 발견한 셈이었다. 바다도 보통 바다가 아니라 해적들이 날뛰는 바다 말이다. 서적 관련해서는 세계 최고(?)의 대양이 아닐까. 매년 시상식을 여는 것도 아니니 최고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대한 바다였다. 흔히 저작권을 어기는 짓을 Piracy, 즉 해적질이라고 부른다. 저작권의 바다를 약탈하며 유유히 도망가는 사람들도 해적이라 칭한다. 군대 동기 중에 이런 해적질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 공짜로 즐길 것을 즐길 수 있지 않냐며. 나는 동기한테 그럼 창작자는 뭐 먹고 사냐며 반박했다.


  나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다. 와레즈와 프루나와 토렌트 시대를 살아왔고, 그만큼 내 손도 구정물이 뚝뚝 떨어진다. 누굴 비난할 자격은 없다. 비난할 자격이 없으니 비난하진 않겠다. 2015년에 한 정보제공 사이트가 여기를 고소했다는 소식으로 이 사이트에 대한 감상을 대신하겠다. 링크는 올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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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는말안드뤄'는 강한가? (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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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말했다.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너를 강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수많은 쿠소게임과 고통스러운 겜알못 플레이는 왜 연두를 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연두는 강한 걸까?

 

강함이란 무엇일까? 근육이 많고 힘이 센 사람은 강하다. 연두는 강함을 동경한다. 프로레슬러와 근육질 남성 모델이 나오면 눈을 감지 못한다. 안 그래도 치명적인 시력을 희생하면서까지 강함을 찬미한다. 교황을 접선한 15세기 유럽 농노들의 시선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불행히도 연두의 자캐는 근육이 없다. 아마 제작 과정(?)에서 실수가 있던 것이 분명하다. 눈 색깔까지 오드아이로 정해두었는데 그런 디테일을 놓쳤을 리가 없다. 샘표에서 출시한 조미료 연두에 투쟁-도망 반응을 보일 만큼 철두철미한 연두가 말이다.

 

혹시 특별함이 강함은 아닐까? 군계일학이라는 사자성어처럼. 그러나 다름이 뛰어남은 아니다. 불행히도 이 말은 연두 본인이 증명한다. 연두 제2의 자캐라는 치코리타는 귀엽고 깜찍하다. 그만큼 약한 것으로 특별하다. 포켓몬스터 금/은 스타팅 포켓몬 중 브케인은 등에 불꽃이 일렁인다. 리아코는 귀엽지만 무서운 악어이빨을 지녔다. 반면에 치코리타는 초등학생이 찰흙을 아무렇게 빚은 듯 어정쩡한 몸 위에 이파리 한 장을 꽂았을 뿐이다. 그야말로 리아코가 물을 붓고 브케인이 불을 붙여 치코리타로 국을 끓일 형국이다. 이런 포켓몬과 연두가 같은 종족으로 취급당하는 대한민국이 UN 인권위원회의 경고를 받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 하겠다.




 

꼭 물리적으로 강할 필요는 없다. 정신이 강해도 강자다. 아반떼는 마하트마 간디보다 단단하지만, 간디는 위인전이 있고 아반떼는 없지 않은가. 연두는 정신력이 강한가? 남들이 알지도 못하는 똥겜을 들고 오는 연두를 보면, 정신력 쪽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육신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해서 몸을 막 굴리며 살았다는데, 똥겜을 하는 연두와 시청자들은 21세기의 소크라테스다. 게다가 연두는 골프공 게임을 클리어하지 않았는가. 중간에 요정님!’을 외치며 빤스런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사실 스트리머로 돈 받으니까 하긴 했지만 그래도 클리어는 클리어다. 남들이 버린 자식 취급하는 소닉을 아들처럼 아끼고, 망한 소닉 게임을 사러 서울까지 다녀와서 울어버리는 연두는 정신력이 강할 것으로 예측된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소닉과 똥겜을 좋아하는 것은 강한 정신력이 아니라 광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릴 시간이 왔다. ‘연두는말안드뤄는 강한가? 여기서 연두 직업을 생각해야 한다. 연두는 스트리머다. 매일 천 명이 넘는 시청자를 모은다. 시청자들은 매일 도네이션을 보낸다. 연두는 카메라와 마이크와 최신게임을 돌릴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과 스위치와 닌텐도 라보를 가지고 있다. 요즘엔 헬스와 발성 훈련을 받고 미소녀가 나오는 모바일 게임에 몇십만 원을 쓴다. 이것은 자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 연두에는 물리력, 정신력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자본이 있다. 자본력이 물리력보다 강하다. 김동현과 이재용 중 누가 되고 싶은가? 연두는 자본이 있다. 그러므로 강하다. 증명 끝.


트위치 링크

유튜브 링크

 

P.S. 가끔 표현되지 못한 자본력은 이라는 게임을 하면 뒤틀린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인터넷 방송계의 화석 우왁굳

머도기닷! 스트리머 머독을 만나다

엽엽! 풍월량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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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무한리필을 선물로 받은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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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튼, 톰슨, 러더퍼드... 프리미어 리그 축구선수 이름이 아닙니다. 과학자 이름입니다. 그것도 원자구조를 밝혀낸 과학자들의 이름이죠. 지금은 과학책에 자리잡아 머리를 아프게 하는 모형 이름이기도 합니다. 원자를 공처럼 본 달튼 모형, 전자가 여기저기 건포도처럼 박혀 있다고 본 톰슨 모형... 그중 보어 모형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태양계처럼 본 모델입니다.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가 창안했습니다.





  닐스 보어는 원자구조 모형으로 고등학교 과학책에도 나오지만, 코펜하겐 해석 등으로 더 어려운 과학 교과서에도 그 이름을 올립니다. 원소번호 107번 보륨은 그를 기려 이름을 붙인 원소기도 합니다. 보어는 1922년 원자 구조와 양자 역학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재기도 한데요. 노벨상만 해도 엄청난 업적인데, 보어는 이에 더해 남자들의 로망까지 선물로 받습니다. 바로 수도꼭지에서 맥주가 나오는 집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유명한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는 예전부터 자국 과학자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칼스버그 재단은 당연히 맥주도 연구하지만, 기초학문 연구를 도와왔고 지금도 돕고 있습니다. 보어도 예외는 아니라서 칼스버그 재단에서 보어한테 기금을 주거나 연구소 설립을 도왔는데요. 칼스버그는 노벨상을 수상한 보어한테 양조장 바로 옆에 있는 집을 선물했습니다. 집은 양조장과 파이프로 연결해서, 언제든 원할 때마다 맥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보어가 그 집을 좋아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평생 그곳에서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급하게 나라를 탈출해야 했으니까요. 보어는 1945년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1954년 CERN 설립에 참여한 보어는 1962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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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비호감인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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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바라지 않을 노래



  오늘날 기업은 설문조사와 시연회 등으로 고객 수요를 파악합니다. 기업은 좋아하는 맛과 스타일을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에 맞게 제품을 만듭니다. 가끔 신호등 치킨처럼 이상한 제품이 나오긴 하지만, 기업은 소비자 취향에 대체로 귀를 기울입니다. 음악에도 이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사람들한테 음악 취향을 묻고 그대로 작곡하는 겁니다. 아니면 반대로 갈 수도 있죠. 무슨 음악을 싫어하는지 물어보고,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음악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탈 코마, 알렉스 멜라미드, 데이비스 솔저는 97년 세상이 제일 싫어할 음악을 발표합니다. 일명 가장 바라지 않을 음악(The Most Unwanted Song)은 설문 조사를 토대로 대중이 싫어하는 요소만 넣은 음악입니다. 비탈 코마와 알렉스 멜라미드는 94년 설문 조사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림을 조사해 책으로 냈는데, 후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데이비스 솔저가 '이걸 음악에도 적용하면 어떨까'라며 제안해서 이런 음악이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500여명에게 설문지를 돌려 음악 취향을 물었습니다. 악기, 길이, 분위기, 빠르기, 주제, 창법 등 좋아하고 싫어하는 스타일을 조사했습니다. 이어서 제일 호감도가 낮은 요소만 팍팍 집어넣었습니다. 악기로는 아코디언, 백파이프, 밴조 등을 쓰고 오페라 소프라노가 대형마트에 가자는 CM송 가사와 정치 슬로건 등을 조 없는 랩으로 부릅니다. 빠르기와 높낮이는 듣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휙휙 바뀌고 격하게 오갑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목소리도 첨가했습니다.


  데이비스 솔저는 작곡가 노트에서 '이 요소들을 겹치게 싫어하는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이 노래를 좋아할 사람은 전세계에 200명 이하일 것이다'라면서 통계학적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설문조사 참여인원이 좀 적어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만 명한테 물었으면 더 완벽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직접 들으니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계속 듣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귀를 막고 싶지는 않네요. 조금 더 분발하셔야 겠습니다.



직접 들어보기




관련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The_Most_Unwanted_Song

https://www.wired.com/2008/04/a-scientific-at/

http://awp.diaart.org/km/musicc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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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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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팔트는 고체인가? 많은 사람은 이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승합차와 트럭, 심지어 이삿짐 센터 차량과 장갑차까지 끄떡없이 지나가는 아스팔트가 고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폭염에 녹아버린 아스팔트와 갓 깔아 뜨듯한 아스팔트를 밟으면 생각이 조금 바뀐다. 신발에 쩌적 달라붙는 모습이 고체라고 하기엔 조금 의심스럽다. 그런데 이건 고열에 녹아서, 아직 굳지 않았다는 핑계가 있지 않은가.



The University of Queensland Archives



  아스팔트, 타르, 송진 같은 물질을 피치(Pitch)라고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피치는 고체인가? 91년 전인 1927년, 호주 퀸즐랜드 대학교 물리학 교수 토마스 파넬은 고체처럼 보이는 물질도 액체처럼 흐를 수 있음을 보이는 실험을 시작한다. 실험 과정은 간단하다.



1) 피치를 유리 깔대기에 담는다.

2) 기다린다.

3) 언젠가 방울이 떨어질 것이다.



  만약 방울이 떨어진다면 피치는 고체가 아니라 아주아주아주 점성이 높은 액체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아주아주아주 점성이 높기 때문에, 방울이 떨어지는 데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피치를 담은 건 1927년이지만 3년 후인 1930년에 깔대기 출구를 열었으므로 피치는 이때부터 흘러나왔다. 첫 방울은 1938년 떨어졌다. 이후 1947년, 1954년, 1962년, 1970년, 1979년, 1988년, 2000년, 2014년에 떨어졌다. 간격은 약 8년~12년이며 이 추세대로 간다면 다음 방울은 2022~2026년에 떨어질 것이다.


  아스팔트가 떨어지는 이 귀중한 순간은 그러나, 실험을 시작한 파넬 교수도, 실험을 이어받은 존 메인스톤 교수도 보지 못했다. 파넬 교수는 1948년 사망했다. 메인스톤 교수도 주말에 방울이 떨어지거나 물을 마시러 자리를 뜬 사이에 떨어지는 등 불운이 겹쳐 '그 순간'을 놓쳤다. 이후 카메라까지 설치했지만 2000년 8번째 떨어지는 모습은 기술 문제로 찍는 데 실패했다. 메인스톤 교수는 2013년 사망하고, 현재는 앤드류 화이트 교수가 실험을 맡는다.


  다행히 2014년 아홉 번째 방울은 카메라로 촬영에 성공했다. 아스팔트기 때문에 방울이 떨어진다기보다는 그냥 방울이 밑면과 닿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2000년 8번째 방울이 떨어지면서 물질의 점성이 계산 가능해졌다. 계산 결과 아스팔트는 물보다 2천 300억 배 점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확성에 의문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온도나 습도를 계절과 날씨에 고스란히 맡긴 이 실험이 과연 정확하냐는 것이다.


  정확성이 어찌되었든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실험은 듣기만 해도 재밌는 이야기다. 이 실험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진행한 실험실 실험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실험기구는 퀸즐랜드 건물에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에 들어가면 생방송으로 실험을 지켜볼 수 있다(오류가 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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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S9 배경화면 - WATCHI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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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상 카메라로 보는 듯한 남성의 얼굴.

붉은색 한가운데 눈코입이 초록빛을 띈다.

이쪽을 바라보며 '할 말 없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1984> 속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1440X2960)


watching_you.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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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써 꼰대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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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치에 들어갑니다. 스트리머 방송을 봅니다. 풍월량, 머독, 꽃빈, 소니쇼, 연두는말안드뤄. 못 본 방송은 유튜브에서 봅니다. 제 휴대전화에서 유튜브 앱을 켜면 추천 영상으로 스트리머 게임 실황만 주르륵 나옵니다. 유튜브에 로그인한 채 영상을 보면, 유튜브가 사용자 기록을 토대로 추천 영상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PC방 같은 곳에서 유튜브에 접속하면 로그인하지 않았으니 그냥 현재 인기 영상만 보여줍니다.

 

  인기 영상은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게임 실황도 있지만, 예능 채널과 사회 이슈 채널, 화장품 채널이나 순위 정하는 채널도 보입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영화 추천 채널입니다. 영화 채널이 내건 동영상 제목은 비슷비슷합니다. ‘XXYY하는 영화’, ‘AA해서 BB해버린 남자.’ 섬네일은 사람의 호기심을 극대화하는 사진을 넣습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섬네일을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하고 싶습니다. 이목을 끄는 일은 모든 예술가와 정치가가 바라마지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클릭하고 싶은 제목과 섬네일을 정하는지. 저는 이런 영화 채널 영상 목록을 보면 클릭하고픈 마음을 억누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 그런 영상 제목과 섬네일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질투를 느낀 걸까요? 조회 수와 채널 수익이 높아 배가 아픈 걸까요? 확실히 인기 있는 영화 채널은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고요. 합법적으로 구했을 리 만무한 영화 영상을 편집해 넣고, 거기에 자막과 음성을 넣어 저작권법에 가까스로 걸리지 않는 영상에 불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기분 나쁨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영화가 그 채널에 오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영화잡지를 구독하지 않는 이상 오로지 텔레비전에서만 영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최신 소식이나 그랬고, 몇 년만 지난 영화는 제 또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일하게 영화를 과거에서 끄집어내 보려면 주말 밤마다 텔레비전을 켜고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를 봐야 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봤고, 재밌으면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또 봤습니다. 비디오 대여비도 엄연히 돈이었기에 아무거나 빌릴 수는 없어서 텔레비전이라는 검증 매체를 사용한 셈이죠.

 

  인터넷이 널리 퍼지고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급되면서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영화를 손쉽게 보게 되었습니다. 늘 방송국이 고른 영화만 보다가 선택권을 쥐게 된 것이죠. 예전엔 개인주의 문화가 퍼지면 영화처럼 다수를 겨냥한 매체가 고꾸라질 줄 알았는데,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서로 영화, 드라마를 찍겠다면서 뛰어들고 있습니다. 무게중심이 방송국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갔을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90년대 후반 출생자를 상상해 봅니다. 지금 청소년인 그들은 저처럼 매주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면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화, 드라마를 고를 선택권이 많았죠. 그들에게 영화는 영화관에 가거나 골라서 보는 것이지 기다리면서 보는 것은 아닐 겁니다. 지금 아이들이 플로피 디스켓, 게임보이, 비둘기호를 본 적 없듯이 말이죠.

 




  그래서 영화 추천 채널은 인기가 많습니다. 수많은 영화 중에서 재밌는 것만 골라서 보여주는데 안 보고 배기겠습니까? 게다가 현재 젊은 세대는 80년대와 90년대 황금기를 누리던 영화를 잘 모릅니다. 터미네이터, 나 홀로 집에, 인디아나 존스는 지금 봐도 재밌는 영화입니다. 이걸 모르고 자란 세대는 유튜브를 제외하면 이런 영화를 알 기회가 적습니다.

 

  명작이 알려지는 건 기쁜 일입니다. 유튜브 채널이 알린다는 점에서는 기분이 조금 상하네요. 특히 영화 전체 줄거리와 큰 상관이 없는 섬네일과 제목을 보면 말이죠. 이러다가는 터미네이터 2무쇠 로봇과 액체 로봇이 한탕 싸우는 영화라든가 날라리 소년이 사실 인류의 지도자!?’라는 제목으로 올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불만을 빼면 유튜브 영화 채널이 거슬릴 이유가 없으니, 아무래도 저는 30살도 차기 전에 꼰대가 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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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한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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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동네를 걷다가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녁이었고 하늘은 슬슬 주황빛인데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졌습니다. 비는 몇 분 만에 그쳤지만, 어디에도 구름은 없었습니다. 비란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것이고 먹구름이 끼면 사방이 어둑해지는데 맑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진 거였죠. 저는 집에 가서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어머니는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현상은 여우비였습니다. 먹구름이 없는데 비가 내리는 이 신기한 현상은 사실 먹구름이 있는 현상입니다. 하늘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비가 땅에 내리기 전에 먹구름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리거나 빗방울이 먹구름이 없는 곳까지 날아갑니다. 제가 여우비를 맞던 날 하늘은 맑았으니까 아마 다른 곳에서 내린 비가 바람을 타고 제 동네까지 날아왔을 겁니다. 그나저나 여우비인데 왜 장가는 호랑이가 갈까요.

 



 

  어머니도 실제 호랑이의 혼인과 여우비라는 자연현상이 무관하다고는 믿으십니다. 그냥 옛날 속설이고 살짝 로맨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엔 이만큼이나 이상한 생각을, 그것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이 생명을 창조했다거나 영혼과 교감할 수 있다거나 악마가 세상을 멸망하리라는 내용 등이죠. 굳이 종교가 아니어도 세상에는 이상한 믿음이 널렸습니다. 제일 유명한 것이 선풍기 괴담이죠. 선풍기를 켜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제 주위 친구들은 다 그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발명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사람이 잠들면 선풍기를 끄는 장치를 소개하며 이런 속설을 소개했죠. 이외에도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든가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틀렸다는 걸 알지만, 선풍기를 켜놓으면 자기가 껄끄럽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지만 힘들 땐 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 당신이 있다면, 이 개 같은 상황을 좀 처리해 줘요. 그 정도 능력이 없을 리 없으니까.’ 믿지 않으시겠지만 이런 가정법 기도도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켜줍니다. 반의반만 신을 믿고 기도해도 이 정돈데 매주 교회를 나가며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달달 외는 사람은 종교가 얼마나 소중한가 싶습니다.


  중학교 시절 학원 물리 선생은 이와는 다른 이유로 신을 믿었습니다. 선생은 어느 날 칠판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습니다. 하나는 과학이 설명하는 세상, 다른 하나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선생 왈,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어딘가에 신이 있을 수 있다. 아직 신이 없다고 말하긴 이르다. 선생의 논리라면 신이 있다고 말하기도 이르지 않을까 싶네요. 그때는 과학을 잘 아는 사람이라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글쎄요.

 




  어디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크레도 콘솔라스. 내 마음을 달래주기 때문에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상한 믿음은 확실히 믿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믿으면 내세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옳고 그름을 넘어 무언가 설명하기만 해도 우리는 편안합니다. 기상학이 없던 시절 여우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불편함은 의외로 컸을 겁니다. 세계 많은 신화가 그래서 세계 탄생과 원리를 설명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늘과 땅은 누가 만들었는지, 해와 달은 왜 뜨는지 비는 왜 오는지 나무는 어떻게 자라는지. 드라마 엑스파일에 나오는 명대사 우리는 믿고 싶다.’는 멀더 요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 통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달래주기 때문에 믿는다. 이 문장을 뜯어보면 색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문장에는 나는 이게 사실이 아님을 알지만 믿는다는 뉘앙스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실이 아님을 안다, 사실인지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을 달래주기 때문에 믿는다. 믿기는 쉽지만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충 개연성과 사실성만 있으면, 아주 살짝 마음에 힘을 써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믿음을 깨려면 수많은 증거와 자기 설득이 필요하죠. 사람은 믿고 싶은 동물일 뿐만 아니라 믿기 쉬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정보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겁니다. 부모, 선생, 교과서, 친구, 인터넷, 신문, 뉴스 등에서 들은 정보는 곧 우리 머리에서 기정사실로 됩니다.

 




  불행히도 세상엔 틀린 것이 가득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고 잘못임을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사기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의심하면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죠. 사기꾼은 우리한테 이익을 준다고 거짓말하니 듣기 좋은 말은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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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중간, 고독한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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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다 보면, 특히 케이블 방송이나 뉴스 채널을 보면 프로그램 사이마다 기부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유니세프나 난민기구에서 만든 것인데요.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와 여성들을 보여줘서 여러분의 죄책감을 유도합니다. 아이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애잔한 바이올린 선율이 슬픔을 더합니다. 해설 목소리는 화룡점정으로 기부 전화번호를 불러주죠.

 

물론 그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저도 기아와 전쟁, 난민이 없는 세상을 원하죠. 이런 일들은 세상에 다시 없을 비극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굶지도 죽어가지도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학교는 줄을 잘 세웁니다. 시험을 보고 성적이 나오면 점수를 바탕으로 등수를 매깁니다. 등수가 높을수록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대학교에 가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회사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면이런 식으로 계속되죠. 많은 책과 강의와 사상가들은 이런 등수 매기기를 비판해 왔습니다. ‘사람은 다원적이다.’, ‘다양성을 생각해야 한다.’든가. 많이 들어보셨을 테죠.

 

저도 등수 매기기의 단점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중간 놓치기입니다. 말 그대로 등수 시스템에서는 중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죠. 꼴등도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꼴등은 늘 멸시받고, 무시당하고 차별당합니다. 그러나 중간 등수도 다른 방법으로 불행해집니다. 동정도 못 받고, 그렇다고 뻐길 만큼 등수도 높지 않습니다. 근처 사람에게 불평해 봤자 배부른 소리라며 무시당하죠. ‘넌 그래도 하위권은 아니잖아.’

 

전 이런 무시당하는 중위권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경제성장을 이뤄냈다가 하락하는 한국 같은 나라는 더욱이요. 지금 젊은 세대는 경제 내림세로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세를 한탄하면 돌아오는 소리는 비슷하죠. ‘옛날에는 이것보다 더 심했어.’, ‘옛날에는 다 굶고 살았어. 지금은 굶지는 않잖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거나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포탄에 벌벌 떨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까요? 옛날보다 잘살게 되면 불평불만을 하나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제가 부모님, 조부모님보다 건강하면 병원에 가지도 못 하나요?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아픈 일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 넘어지는 것에서부터 상사에게 잔소리 듣기,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까지 크기와 종류는 다양합니다. 인류는 그런 고통을 없애려 했고, 그 결과 지금의 문명을 이뤘습니다. 농사법을 발전시키고 전기를 발명하고 민주주의와 기타 정치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이의 목적이 일치하지는 않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인류 문명 역사는 아마 덜 아픈 세상을 만드는 역사라 불러도 좋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은 아픕니다. 아프면 치료해야 합니다. 아프지 말아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위권은 늘 고독합니다. 하위권은 동정을 받습니다. 상위권은 권위를 누립니다. 그러나 권위를 누리기엔 낮고, 동정을 받기엔 높은 중위권은 불만을 말할 곳도 없습니다. 입을 열었다가는 양쪽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너는 그 정도면 다행인 줄 알아라.’, ‘좀 더 노력해서 올라오면 되잖아.’

 

다시 말합니다. 아픔을 말할 자격 따위는 없습니다. 자원이 한정적일 때 그 자원으로 급한 사람부터 처리해야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입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아픔을 말하지 못하면 비뚤어집니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비아냥댑니다. 말해도 듣지를 않는데, 왜 말을 하겠습니까. 주먹을 휘두르지. 저는 지금 만연한 혐오 정서 일부는 등수 매기기 문화에 차별적 동정이 결합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문제를 던져놓고 답을 하지 말자니, 참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어쩌면 고통과 설움에 등급을 매기지 않는 것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투덜댈 때, 그 투덜거림이 들어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보다 그냥 인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고독한 중간을 없애는 시작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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