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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0)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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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텍스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3년 출판한 단편집 <Winner Take Nothing>에 수록된 단편 <The Light of the World>를 번역한 글입니다.

 

※ 헤밍웨이는 1961년 사망했으므로 현재 이 작품은 한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 <The Light of the World>는 미국소설학회 헤밍웨이 작품명 번역 통일안에서 <이 세상의 광명>라는 번역제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 원본 텍스트는 fadedpage.com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역과 오역이 많습니다.

 

※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텍스트를 블로그, 사이트, 출판 등에 인용하실 때는 덧글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대는 하지 않겠지만, 덧글을 쓰지 않으신다면 최소한 이 글 링크나 출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 어니스트 헤밍웨이


  바텐더는 우리가 문으로 들어오는 걸 보더니 손을 뻗어 공짜 점심냄비 위로 유리뚜껑을 덮었다.
  "맥주 줘." 내가 말했다. 바텐더는 맥주를 가져와 주걱으로 뚜껑을 따고 손에 잔을 들었다. 난 나무판 위에 동전을 놓았고 그는 맥주잔을 나한테 줬다.
  "그쪽은?" 그가 톰한테 물었다.
  "맥주."
  바텐더는 맥주를 가져와 뚜껑을 따고, 돈을 보고서야 맥주잔을 톰한테 넘겼다.
  "뭐 문제 있어?" 톰이 물었다.
  바텐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머리 너머를 보더니 "그쪽은요?" 하며 방금 들어온 남자한테 말했다.
  "호밀 위스키". 남자가 말했다. 바텐더는 병과 잔과 물 한 잔을 꺼냈다.
톰이 몸을 기울여 공짜점심 냄비 뚜껑을 열었다. 족발 한 냄비에 가위 비스무리한 나무 도구가 있었는데, 끝이 나무포크라 족발을 집을 수 있었다.
  "안 돼." 바텐더가 말하더니 유리덮개를 다시 얹었다. 톰은 나무 가위포크를 집었다. "도로 놔." 바텐더가 말했다.
  "어디다 놓으라고." 톰이 말했다.
  바텐더는 바 아래로 손을 뻗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내가 나무판 위에 50센트를 놓자 그는 몸을 폈다.
  "너 뭐였지?" 그가 말했다.
  "맥주." 난 말했다. 그는 맥주를 주기 전에 두 냄비를 열어주었다.
  "이 족발은 썩은 냄새가 나." 톰이 말하며 입에 있던 걸 바닥에 뱉었다. 바텐더는 말이 없었다. 호밀 위스키를 다 마신 남자는 돈을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나갔다.
  "냄새는 네가 나는 거고." 바텐더가 말했다. "너네 같은 양아치 냄새가 다 그렇지."
  "얘가 우리보고 양아치래." 토미가 나한테 말했다.
  "야." 내가 말했다. "그냥 가자."
  "어서 꺼지라고, 양아치들아." 바텐더가 말했다.
  "나간다고 했잖아." 난 말했다. "네가 시킨 게 아니야."
  "또 올 거거든." 토미가 말했다.
  "아니, 못 와." 바텐더가 톰한테 말했다.
  "저놈이 얼마나 비뚤어졌는지 네가 좀 말해봐." 토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자니까." 내가 말했다.
  밖은 선선하고 컴컴했다.
  "뭐 이딴 데가 다 있냐?" 토미가 말했다.
  "낸들 아냐." 내가 말했다. "기차역이나 가자."
  마을 한쪽 끝으로 들어왔는데 반대편 끝으로 나가게 생겼다. 마을은 생가죽과 타닌수피(가죽 가공에 쓰는 몇몇 나무껍질)와 톱밥 무더기 냄새가 났다. 마을로 들어올 때만 해도 하늘이 어두워지는 중이었는데, 이제는 어둡고 추워서 길가 물웅덩이가 언저리부터 얼어갔다.
  기차역으로 내려가니 갈보 다섯이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렸다. 또 백인 여섯에 인디언 넷이 역사에 있었다. 역사는 붐볐고 스토브 때문에 후끈한 데다가 눅눅한 연기로 가득했다. 우리가 들어오니 아무도 말이 없었고 매표소 문을 내린 뒤였다.
  "문 좀 닫지?" 누가 말했다.
  누가 말하나 봤더니 백인 중 하나였다. 다들 끝단 자른 바지를 입고 목수처럼 고무장화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었다. 그 백인 하나만 모자를 쓰지 않았고, 얼굴은 창백한 데다 손가락이 희고 가늘었다.
  "안 닫을 거냐고?"
  "알았어요." 난 말하고 닫았다.
  "고맙다." 그는 말했다. 동행 중 하나가 끅끅 웃었다.
  "요리사 일하는데 끼어든 적 있어?" 동행이 나한테 말했다.
  "아뇨."
  "얘 좀 끼어들어 봐," 그는 요리사를 보았다. "얘는 이런 거 좋아하거든."
  요리사라 불린 청년은 입을 앙다물더니 동행의 시선을 피했다.
  "얘는 손에 레몬주스를 붓나 봐." 그가 말했다. "죽어도 설거지 물에는 손을 안 넣지. 손 하얀 것 좀 봐."
  갈보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비대한 갈보, 그렇게 비대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알록달록한 실크 옷을 입은 여자였다. 그 여자처럼 큰 갈보가 둘이나 있었지만, 그 여자야말로 무게가 160킬로그램은 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당신도 보면 실존인물이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비대한 셋은 알록달록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셋은 거대했다. 다른 둘은 평범한 갈보처럼 생겼다. 과산화수소로 염색한 금발머리였다.
  "쟤 손 좀 보라고." 남자가 말하며 턱짓으로 요리사를 가리켰다. 갈보는 또 웃고는 몸을 떨었다.
  요리사는 몸을 돌려 여자한테 나지막이 말했다. "토 나오는 살덩어리 주제에."
  여자는 그저 웃고 떨기만 했다.
  "아, 너무 웃겨.."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예뻤다. "웃겨 죽겠네."
  다른 두 창녀, 그러니까 두 비대한 여자들은 그쪽으로 무심하다는 듯 조용하고 침착한 척을 했다. 그래도 그 둘은 거대했고 제일 큰 쪽과 비등했다. 못해도 110킬로그램은 넘었다. 나머지 둘은 기품이 있었다.
남자들을 보자면, 요리사와 떠드는 남자 옆에는 목수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대화를 들으며 관심이 있는 듯 했지만 쑥스러운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자기도 뭔가 말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거기에 스웨덴 사람 둘.. 인디언은 둘은 벤치 끄트머리에 앉았고 하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말할 준비를 하던 남자가 낮은 음으로 나한테 말했다. "건초더미라도 올라갔나 봐."
  난 웃었다. 같은 걸 토미한테 말했다.
  "뻥 안 치고 이런 동네는 난생처음이야." 그가 말했다. "쟤네 셋 좀 봐봐." 그런데 요리사가 말을 꺼냈다.
  "야, 너넨 몇 살이냐?"
  "전 예순여섯이고 얘는 예순아홉인데요." 토미가 말했다.
  "허! 허! 허!" 거대 창녀가 떨리는 몸으로 웃었다. 목소리가 정말 예뻤다. 다른 창녀들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좀 싸가지 있게 말하지?" 요리사가 말했다. "그냥 친절하게 물어본 건데."
  "열일곱이랑 열아홉이요." 내가 말했다.
  "야, 왜 그래?" 토미가 내 쪽을 봤다.
  "괜찮아."
  "난 앨리스라고 해." 거대 창녀가 말하며 다시 몸을 떨었다.
  "그쪽 이름이에요?" 토미가 물었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앨리스. 맞지 않아?" 그녀는 요리사 옆에 앉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 맞는데."
  "원래 그런 이름을 쓰지." 요리사가 말했다.
  "내 본명 맞거든." 앨리스가 말했다.
  "다른 여자들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톰이 물었다.
  "헤이즐과 에델.," 앨리스가 말했다. 헤이즐과 에델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밝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쪽은요?" 나는 금발한테 물었다.
  "프란시스." 그녀가 말했다.
  "프란시스 뭔데요?"
  "프란시스 윌슨. 알아서 뭐 하게?"
  "그쪽은요?" 나는 다른 여자한테도 물었다.
  "들이대지 마." 그 여자가 말했다.
  "얘는 그냥 다 친구 먹고 싶어서 저래."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친구 먹기 싫어?"
  "싫은데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특히 그쪽이랑은."
  "아주 앙칼져." 남자가 말했다. "흔한 앙칼진 소녀."
  금발은 반대편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꼰대새끼." 그녀가 말했다.
  앨리스는 또 웃음을 터뜨리고 몸을 떨었다.
  "하나도 재미 없거든." 요리사가 말했다. "재미없는데도 맨날 웃어제낀다고. 거기 꼬마 둘.. 어디 가는데?"
  "그쪽은 어디 가세요?" 톰이 그한테 물었다.
  "난 캐딜락 가려고." 요리사가 말했다. "안 가봤어? 내 누이가 거기 살아."
  "자기가 누이면서." 끝단 자른 바지 사내가 말했다.
  "그딴 소리 집어치울래?" 요리사가 말했다. "우리 싸가지 있게 좀 말하지?"
  "캐딜락은 스티브 케첼이 살던 곳이고 애드 울가스트(1888~1955) 고향인데." 말 적은 남자가 말했다.
  "스티브 케첼은요," 그 이름에 반응이라도 한 듯 목소리가 높은 금발 하나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총 맞아 죽었대요. 맞아요. 미친, 자기 아빠가요. 이제 스티브 케첼 같은 남자는 없겠죠."
  "그 사람 이름은 스탠리 케첼(1886~1910) 아닌가?" 요리사가 물었다.
  "아, 시끄러워요." 금발이 말했다. "스티브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요? 스탠리라니. 스탠리가 아닌데요. 스티브 케첼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멋진 남자였어요. 스티브 케첼처럼 깨끗하고 희고 아름다운 남자는 본 적이 없네요. 그와 비슷한 남자도 못 봤죠. 움직이는 모습은 호랑이 같았죠. 정말 훌륭하고 자유롭고 돈도 팍팍 쓰는 남자였어요."
  "아는 사이였어?" 남자 하나가 물었다.
  "제가 아냐고요? 제가 아냐고요? 제가 사랑했냐고요? 질문이 그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누군갈 아는 것보다 더 잘 그를 알았고, 당신 같은 사람이 신을 사랑하듯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세상 누구보다 위대하고 훌륭하고 가장 하얗고 아름다운 남자, 스티브 케첼. 그런 그분을 자기 아비가 개처럼 쏴 죽였죠."
  "그 사람 경기라도 챙겨 줬어?"
  "아뇨. 그전부터 알았어요. 제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는데."
  과산화수소 금발은 계속 높은 음으로 배우처럼 말했고, 모두 그 말을 깊이 새겨들었다. 그런데 앨리스가 다시 몸을 떨었다. 옆에 앉은 나한테도 그 떨림이 느껴졌다.
  "그럼 결혼했어야지." 요리사가 말했다.
  "그분 경력에 흠을 내고 싶지 않았어요." 과산화수소 금발이 말했다. "그분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죠. 그분은 아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어요. 아, 정말 남자다웠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요리사가 말했다. "잭 존슨(1878~1946)이 그 사람을 눕히지 않았나?"
  "그건 반칙이었어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그 큰 검둥이가 느닷없이 덤볐다고요. 그분도 그 시꺼먼 놈을 때려눕힐 수 있었는데. 깜둥이 놈이 운발로 이긴 거죠."
  매표소 창문이 올라갔다. 인디언 셋이 그리로 들어갔다.
  "그분도 그놈을 때려눕혔어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절 보고 미소까지 지었다고요."
  "경기 챙긴 적 없다고 한 것 같은데." 누군가 말했다.
  "그날 경기만 빼고요. 스티브가 절 보고 미소를 짓는데 갑자기 그 흑인 새끼가 확 뛰어올라서 갑자기 후렸다니까요. 스티브라면 그런 흑인놈은 백 명은 눕힐 텐데."
  "참 잘 싸우던 사람이었지." 한 목수가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요즘엔 그런 격투가가 없어요. 그분은 신과 마찬가지였어요. 아주 하얗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빠르고 호랑이 같았고 번개 같았어요."
  "나 그 사람이 싸우는 영상을 봤어." 톰이 말했다. 우리는 꽤 감동을 받은 것이었다. 앨리스는 계속 온몸을 떨었다. 내가 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이미 승강장으로 나간 뒤였다.
  "그분은 최고의 남편감이었어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우리는 신의 눈길 속에서 결혼했고 지금 전 그분과 함께고 언제까지나 그렇겠죠. 제 모든 건 그이 것이죠. 제 육신은 상관없어요. 몸이야 가져가라죠. 제 영혼이야말로 스티브 케첼 것이에요. 그래요, 그이는 진짜 사나이였죠."
  우리는 몸둘 바를 몰랐다. 슬프면서도 낯부끄러웠다. 그때 계속 덜덜 떨던 앨리스가 말했다. "이 더러운 사기꾼아." 그녀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스티브 케첼이랑 절대 아는 사이도 아니었어."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과산화수소가 보란 듯이 말했다.
  "사실이니까 나오지." 앨리스가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나만 스티브 케첼을 알아. 난 맨셀로나에서 태어났어. 거기서 스티브를 알게 됐어. 진짜야. 너도 인정할걸. 이게 거짓말이면 하느님이 나한테 벼락을 내릴 거다."
  "제가 틀리면 저한테도 벼락을 내리라죠."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정말, 정말, 정말이야. 너도 알잖아. 지어낸 게 아냐. 그 사람이 나한테 한 말도 기억해."
  "뭐라고 했는데요?" 과산화수소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앨리스는 아직 우는 중이어서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말했지. '넌 정말 아름다워, 앨리스.' 토씨 하나까지 이렇게 말했어."
  "거짓말."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진짜야." 앨리스가 말했다. "정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거짓말." 과산화수소가 보란 듯이 말했다.
  "아냐. 진짜, 진짜, 진짜야. 예수님과 성모님을 걸고 진짜야."
  "스티브가 그리 말했을 리 없어요. 그분 말투가 아닌데요." 과산화수소가 낭랑하게 말했다.
  "진짜라니까." 앨리스가 그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믿든 말든 그점은 변하지 않아." 앨리스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차분했다.
  "스티브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니까요." 과산화수소가 선을 그었다.
  "그렇게 말했어." 앨리스가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나도 그 사람 말대로 사랑스러운 여자였어. 지금도 너보다는 나은 여자야. 이 말라붙은 보온 물주머니야.."
  "누가 누구보고 욕을 해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그쪽은 고름덩어리면서. 나도 기억을 한다고요."
  "아니." 앨리스는 달곰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탯줄을 빼낸 거랑 이것저것 살던 걸 빼면 넌 기억하는 게 없어. 나머지는 전부 신문에서 읽은 거지. 너도 알지만 난 깨끗해. 너도 알지만 내 몸이 커도 남자들은 날 좋아해. 너도 알지만 난 거짓말을 안 해."
  "내 기억을 건들지 마요." 과산화수소가 말했다. "진짜 기억이고 대단한 기억들이에요."
  앨리스는 그녀를 보고, 그다음 우리를 보았다. 가슴 아파하던 표정이 얼굴에서 사라지더니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 제일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얼굴도 아름다웠고 살갗도 부드러웠고 목소리도 사랑스러운 데다 쭉 예의가 발랐고 진짜 살가웠다. 하지만 세상에 그녀는 정말이지 거대했다. 세 여자를 합친 듯 거대했다. 톰이 그녀를 보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야, 가자."
  "잘 가." 앨리스가 말했다. 정말 좋은 목소리였다.
  "잘 있어요." 내가 말했다.
  "너네 어느 방면으로 가는데?" 요리사가 물었다.
  "아저씨 반대 방향이요." 톰이 요리사한테 말했다.

 

 

 


* 스탠리 케첼은 '미시건 암살자'라는 별명을 지닌 복싱선수였다. 케첼은 1909년 10월 16일 잭 존슨을 상대로 월드 헤비급 경기를 펼쳤는데, 케첼이 존슨을 쓰러뜨리자 존슨이 일어나 케첼을 어퍼컷으로 녹아웃시켰다. (지금도 영상이 남아있다) 케첼은 1910년 10월 4일 자기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앙심을 품고 쏜 총에 맞아 다음날 사망한다. 과산화수소 여자가 '자기 아비한테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 말은 잘못 알았거나 거짓말인 것 같다. 인터넷 검색 결과 동시대에 스티브 케첼이라는 복싱선수도 살았음이 기록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일행은 둘을 헷갈리는 듯하다. 헤밍웨이는 복싱을 즐겼으니 작가가 아니라 등장인물이 헷갈려한다고 믿고 싶다. 본문에 나오는 애드 울가스트도 미국 복싱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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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깨끗하고 조명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 -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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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텍스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3년 출판한 단편집 <Winner Take Nothing>에 수록된 단편 <A Clean, Well-Lighted Place>를 번역한 글입니다.


※ 헤밍웨이는 1961년 사망했으므로 현재 이 작품은 한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 <A Clean, Well-Lighted Place>는 미국소설학회 헤밍웨이 작품명 번역 통일안에서 <정결하고 조명이 잘 된 장소>라는 번역제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 원본 텍스트는 fadedpage.com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역과 오역이 많습니다.


※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텍스트를 블로그, 사이트, 출판 등에 인용하실 때는 덧글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대는 하지 않겠지만, 덧글을 쓰지 않으신다면 최소한 이 글 링크나 출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깨끗하고 조명 밝은 곳

- 어니스트 헤밍웨이

 

 

날이 늦어 모두 카페를 떠났지만 한 노인만이 전등빛이 나뭇잎을 비춰 나타난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다. 낮 거리는 먼지가 날렸지만, 밤이 되자 이슬이 먼지를 가라앉혔고 노인은 밤까지 앉아 지내기를 좋아했다. 노인은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용했고 노인은 그 다름을 감지했다. 카페에선 웨이터 둘이 노인의 미약한 취기를 눈치챘다. 노인은 단골이었기에 웨이터들은 노인이 너무 취하면 돈도 안 내고 나갈까 봐 예의주시했다.

지난주에 저 사람 자살을 시도했다는데,” 한쪽 웨이터가 말했다.

?”

절망했나 보지.”

뭐에?”

그냥.”

그냥인 줄 어떻게 알아?”

저 사람은 돈이 아주 많거든.”

웨이터들은 카페 현관 옆 벽을 맞댄 탁자에 같이 앉아 테라스를 쳐다보았다. 테라스에는 노인이 앉은 걸 빼면 모든 테이블이 휑했다. 노인이 속에 앉은 나뭇잎 그림자는 바람에 살살 움직였다. 소녀와 군인이 거리를 지나갔다. 거리의 불빛이 군인이 소매에 단 장식을 빛냈다. 아무것도 머리에 쓰지 않은 소녀는 헐레벌떡 군인 옆을 따랐다.

경비대가 저 사람을 데려가겠지,” 한쪽 웨이터가 말했다.

가던 곳에 도착하면 무슨 소용이야?”

슬슬 거리에서 비켜나야 할걸. 경비대가 잡아낼 거야. 5분 전에 경비대가 지나갔거든.”

그림자 속에 앉은 노인은 잔으로 받침을 두들겼다. 둘 중 어린 웨이터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노인이 웨이터를 보았다. “브랜디 더.” 노인이 말했다.

이러다 취하시겠어요,” 웨이터가 말했다. 노인이 웨이터를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물러났다.

밤새 지낼 작정인가 봐,” 웨이터는 동료 웨이터한테 말했다. “이제 졸리는데. 세 시 전에 자긴 글렀어. 지난주에 자살이나 성공할 것이지.”

웨이터는 브랜디 병과 카페 계산대에 있는 다른 컵 받침을 집어서 노인이 앉은 테이블로 진군했다.

지난주에 자살하셨어야죠.” 웨이터는 귀머거리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만 더.” 노인이 말했다. 웨이터는 잔에 브랜디를 부었다. 브랜디가 살짝 넘쳐 쌓아놓은 받침으로 흘러내렸다. “고맙네.” 노인이 말했다. 웨이터는 병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다시 직장동료 옆에 가서 앉았다.

이제 취했네.” 웨이터가 말했다.

맨날 밤마다 취하잖아.”

왜 자살 시도했대?”

내가 어떻게 알아.”

무슨 방법을 썼대?”

밧줄로 목을 맸대.”

밧줄을 잘라 구한 쪽은?”

조카.”

뭐하러 구했대?”

노인 영혼이 타락할까 봐.”

노인 재산이 얼마라고?”

아주 많아.”

노인 나이가 여든은 될 텐데.”

어찌 되었든 여든은 되었겠지.”

이제 집에 좀 가지. 세 시 전에 자긴 글렀네. 나처럼 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 노인은 저 좋으라고 깨어 있는데.”

저쪽은 홀몸이고. 난 아니라고. 난 침대에서 기다리는 마누라가 있어.”

저쪽도 아내는 있었겠지.”

지금 아내가 있어도 쓸모없었을걸.”

그건 모르지. 아내가 있으면 더 나았을지도.”

조카가 저 사람을 보살핀대.”

나도 알아. 아까 조카가 밧줄을 잘랐다면서.”

그렇게까지 늙고 싶진 않아. 늙으면 추해져.”

다 추해지진 않지. 이 할아범은 깨끗해. 술도 안 흘리지. 지금 취했는데도. 봐봐.”

보기도 싫어. 빨리 저 노인이 집에 갔으면 좋겠어. 일해야 하는 사람을 배려하질 않아.”

노인은 술잔 너머로 광장을 바라보았고, 곧 웨이터들을 보았다.

브랜디 더.” 노인이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나온 웨이터가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웨이터는 멍청한 사람이 취객이나 외국인을 상대할 때 말하는 방식을 티 냈다. “오늘 밤은 안 돼요. 영업 끝입니다.”

한 잔 더.” 노인이 말했다.

안 돼요. 끝났다고요.” 웨이터는 수건으로 테이블 끄트머리를 닦아내고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일어섰다. 느릿느릿 받침 수를 세고 가죽 동전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술값을 냈다. 반 페세타(스페인 옛 통화)는 팁이었다.

웨이터는 노인이 거리를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주 많이 늙은 남자는 불안정했지만, 품위가 있었다.

그냥 마시게 두지 그랬어?” 느긋한 쪽 웨이터가 물었다. 둘은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두 시 반도 안 됐어.”

집에 가서 잘래.”

한 시간도 못 기다려?”

늙은이보다 나한테 시간이 중해.”

모두 같은 한 시간이야.”

너도 그 할아범처럼 말하네. 그 할아범은 술 한 병 사서 집에서 마시면 되잖아.”

둘은 다르지.”

다르긴 해.” 유부남 웨이터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쁜 사람이 될 맘은 없었다. 그저 성급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너는? 보통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는 게 무섭지 않나 봐?”

기분 나빠지라고 한 소리냐?”

아냐, 인마. 그냥 농담한 거야.

아니지.” 급한 쪽 웨이터가 금속 셔터를 내린 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난 자신 있는데. 난 자신감으로 가득하니까.”

넌 젊고, 자신만만하고, 취직도 했지.” 형인 웨이터가 말했다. “넌 모든 걸 갖췄어.”

그쪽은 뭐가 부족한데?”

일자리 빼고 다.”

나한테 있으면 다 너한테도 있어.”

아니. 난 자신감도 없고 젊지도 않아.”

어서 가자. 헛소리는 그만하고 마감하자고.”

난 카페에 늦게 남는 파거든.” 형인 쪽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기 싫어하는 사람과 같은 편이야. 밤에도 빛이 필요한 사람과 같은 편이고.”

우리는 서로 다른 편이지.” 나이를 더 먹은 웨이터는 말했다. 웨이터는 집에 갈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젊음과 자신감이 엄청 아름다운 존재지만, 이건 젊음과 자신감 문제가 아니야. 매일 밤 난 마감하기가 꺼려져. 카페가 필요한 사람이 어딘가 있을 수 있거든.”

형씨, 온종일 여는 보데가(스페인 구멍가게)가 있잖아.”

말귀를 못 알아듣네. 여긴 깨끗하고 즐거운 카페야. 조명도 밝고. 조명도 아주 좋고, 지금은 나뭇잎 그림자도 있어.”

잘 자.” 동생인 쪽 웨이터가 말했다.

너도 잘 자.” 상대는 말했다. 웨이터는 전등을 끄고 자기와 대화를 이었다. 물론 조명도 중요하지만, 장소는 깨끗하고 즐거워야지. 음악은 안 돼. 음악은 안 되고말고. 이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이 바밖에 없다 해도 품위를 지키면서 바에 갈 수는 없지. 그 노인은 뭐가 무서워서 그랬을까? 무섭거나 불안한 건 아니야. 그건 노인이 너무 잘 아는 것, 였어. 모든 것은 무였고 사람도 무였어. 오직 그뿐이었지. 필요한 것은 빛과 어느 정도의 깨끗함과 질서였지. 어떤 사람은 그 안에 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노인은 알아챘어. 모든 것이 고 따라서 고 그래서 . 에 계신 우리 , 이름이 를 받으시오며 나라가 하옵시며, 뜻이 에서 이룬 것 같이 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날 우리에게 일용할 르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하여 준 것 같이 우리 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하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에서 구하옵소서. 웨이터는 미소를 짓고는 바 앞에 섰다. 증기 커피추출기가 윤기를 빛냈다.

뭐 드시겠소?” 바 주인이 물었다.

.”

“Otro loco mas(또 미친 사람이군).” 주인은 말하고 돌아섰다.

작은 컵으로 하나요.” 웨이터가 말했다.

주인이 웨이터에게 한 컵 따랐다.

조명도 꽤 밝고 분위기도 즐겁지만, 바가 더럽네요.” 웨이터가 말했다.

주인은 웨이터를 슬쩍 보았지만 대답하진 않았다. 얘기하기엔 너무 늦은 밤이었다.

한 잔 더 드릴까?” 주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웨이터는 말하고 나갔다. 웨이터는 바도 보데가도 좋아하지 않았다. 깨끗하고 밝은 카페는 이들과 다른 존재였다. 이제 웨이터는 딴생각 없이 집과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침대에 누워 마침내 햇빛과 함께 잠에 들 것이다. 애초에 웨이터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아마 불면증만 걸린 거라고. 많은 사람이 걸린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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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폭풍이 지나가고(After The Storm) -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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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텍스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3년 출판한 단편집 <Winner Take Nothing>에 수록된 단편 <After The Storm>을 번역한 글입니다.


※ 헤밍웨이는 1961년 사망했으므로 현재 이 작품은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 <After The Storm>은 미국소설학회 헤밍웨이 작품명 번역 통일안에서 <폭풍 후>라는 번역제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 원본 텍스트는 fadedpage.com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역과 오역이 많습니다.


※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텍스트를 블로그, 사이트, 출판 등에 인용하실 때는 덧글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대는 하지 않겠지만, 덧글을 쓰지 않으신다면 최소한 이 글 링크나 출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폭풍이 지나가고

- 어니스트 헤밍웨이


 

주먹을 날릴 일이 전혀 아니었지만 우리는 맞붙었는데, 내가 넘어지자 그는 내 가슴팍에 무릎을 올려 눕히고는 양손으로 목을 졸랐다. 그는 날 죽일 기세였고 나는 내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풀려나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취해서 그를 떼어놓지 못했다. 그가 내 목을 조르고 머리를 바닥에 찧는 사이 나는 칼을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팔 근육을 제대로 그어버렸다. 그는 나를 풀어줬다. 잡고 싶어도 못 잡았을 것이다. 그가 몸을 굴리더니 베인 팔을 부여잡고 울기에 말했다.

내 목을 졸라서 어쩌려고?”

난 그를 죽일 뻔했다. 일주일은 뭘 못 삼켰다. 그도 내 목을 지독하게 아프게 했다.

, 난 거기를 나왔다. 많은 이가 그한테 붙었고 몇몇은 나를 쫓아 나왔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부두로 내려갔다. 거기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거리에서 살인이 났다고 했다. 난 말했다. “누가 죽였대?” 친구는 말했다. “살인범은 몰라도 누가 죽긴 죽었나 봐.” 바깥은 어두웠다. 물기가 거리에 들끓었고 불빛은 다 나가고 창문은 박살 나고 선박은 죄다 마을까지 올라오고 나무는 터져 떠내려갔다. 만물이 다 터져 나갔고 나는 조각배를 얻어 타고 나갔다. 난 망고 키에 정박한 내 보트를 찾아냈고 보트는 물로 가득할 뿐 전부 괜찮았다. 그래서 난 물을 빼고 펌프로 배수했다. 달은 떴지만 수많은 구름도 떴고 아직 날씨는 아주 지독했다. 난 달을 따라 내려갔다. 햇빛이 비칠 즈음엔 동쪽 부두까지 나간 후였다.

형제여, 그 정도면 폭풍이라 부를 만했다. 내가 처음으로 배를 타고 나간 사람이었다. 그런 물길은 너도 본 적이 없을 거다. 물은 잿물 담은 통처럼 뿌옜고 동쪽 부두에서 남동 만까지 해안선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해변 정 가운데를 흐르던 큰 도랑도 터졌다. 나무고 뭐고 다 터져 나가 도랑은 잘려나가고 물은 분필처럼 허옜다. 그 위로 만물이 떠다녔다. 나뭇가지도 나무도 죽은 새도 뭐고 전부 떠다녔다. 삐져나온 모래톱에 전 세계 펠리컨이 모였고 온갖 새가 날았다. 폭풍을 예감하고 온 그곳에 틀어박힌 것이다.

난 남동쪽 모래톱에 종일 누웠다.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배를 타간 사람이었다. 돛대 하나가 떠내려가서 어디선가 난파선이 있다고 확신했다. 난 그 배를 찾아 나섰다. 그 배는 찾았다. 돛대가 셋인 스쿠너(범선의 종류)였고 부러진 돛대들만이 밑동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배는 너무 깊이 가라앉아서 내가 뭘 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걸 찾기로 했다. 내가 1번 타자였으니 뭘 발견하든 내 것이었다. 세 돛대짜리 스쿠너를 떠나 모래사장을 내려갔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미 꽤 멀리 나갔다. 난 갯벌로 나갔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그래서 계속 찾았다. 레베카 등대(플로리다 남단에 있는 등대)가 보이는 곳까지 간 그때 온갖 새들이 뭉쳐 날았다. 난 그쪽으로 가서 뭔지 알아보았다. 그냥 날아다니는 새 무더기였다.

물 밖으로 삐져나온 돛대 비스름한 게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니 새들이 모두 하늘로 날아올라 내 주변을 감쌌다. 그곳 물은 맑았다. 정말 수면 위를 살짝 삐져나온 돛대였다. 나는 다가갔다. 물밑은 기다란 그림자처럼 컴컴했다. 바로 앞까지 가니 물밑에 있던 것은 정기선으로, 온 세상처럼 커다란 몸집을 하고 그저 물 아래에 드러누웠다. 난 배를 타고 그 정기선을 가로질렀다. 정기선은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웠고 후미는 깊숙이 잠긴 후였다. 관측창은 꽉 닫혔고 유리창이 물속에서 빛났다. 사실, 배 전체가 빛났다. 태어나서 본 배 중 가장 큰 놈이 그곳에 있었다. 난 정기선 전체를 따라서 갔다. 정기선 위를 넘어간 다음 닻을 내렸다. 선미에 둔 뗏목을 밀어내서 물에 띄우고 나를 덮어쓴 새들과 함께 노를 저었다.

설거지에나 어울리는 물안경이 있었는데, 손이 떨려서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정기선 전체를 훑었고 보이는 관측창은 전부 닫혔지만, 바닥으로 내려가면 어딘가 열렸을 것이었다. 계속 물건들이 떠올랐으니. 무슨 물건인지는 아리송했다. 그냥 쪼가리들. 새들은 그 쪼가리들을 따라 날았다. 너는 그렇게 많은 새를 본 적이 없을 거다. 모든 새가 내 주변을 날며 미친 듯이 울었다.

모든 것이 뚜렷하고 선명했다. 시야에 정기선이 잠긴 끝부분이 들어왔는데 물밑 깊이가 1마일은 되는 것 같았다. 정기선은 맑은 흰 모래 둑 위에 누운 채였고 돛대는 앞돛대 같기도 하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물 밖으로 기울어진 낚싯대 같기도 했다. 정기선 뱃머리는 그렇게 깊진 않았다. 뱃머리에 새긴 배 이름에 발을 대어도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관측창까지 가려면 3, 4는 내려가야 했다. 이삭 터는 장대를 내리면 창에 닿기에 장대로 창을 깨보려 했지만 깨지지 않았다. 유리가 꽤 두꺼웠다. 그래서 난 배로 돌아가서 렌치를 꺼내 이삭 터는 장대 끝에 감아 붙였지만 그래도 깨지지 않았다. 정기선 창문 너머로 모든 것이 있었고 내가 처음으로 이 배에 도착했는데도 들어가지를 못했다. 분명 속에 있는 것들은 5백만 달러는 나갈 것이었다.

정기선이 분명 품었을 것들을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제일 가까운 관측창을 보니 뭔가 있었지만 내 물안경으로는 정체를 알지 못했다. 장대는 소용이 없어서 난 옷을 벗고 몸을 편 다음 두 번 숨을 들이마시고 뱃머리에서 다이빙했다. 손에는 렌치를 들고 헤엄쳐 내려갔다. 관측창 끝부분에 가니 잠깐 여유가 생겨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한 여자가 머리칼 전체를 둥둥 띄웠다. 여자는 가만히 떠다녔다. 나는 렌치로 유리창을 두어 번 힘껏 후려쳤다. 빠직하는 소리가 났지만 창문은 부서지지 않았고 나는 물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난 뗏목에 몸을 걸치고 숨을 골랐다. 다시 올라가 두 번 숨을 들이마시고 뛰어들었다. 아래로 헤엄쳐 내려가 관측창 모서리를 손으로 잡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렌치로 창을 때렸다. 물안경 너머로 여인이 떠다녔다. 여인의 머리칼은 잠깐 머리에 달라붙더니 다시 사방으로 퍼졌다. 한 손은 반지 여럿을 꼈다. 여인은 관측창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두 번 더 창을 때렸지만, 창은 금도 가지 않았다. 수면으로 올라갈 때는 숨을 쉬어야 하기 전에 못 올라가는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잠수했다. 이번엔 창에 금을 냈다. 금만. 수면으로 올라오니 코피가 났다. 난 맨발로 정기선 뱃머리 배 이름 위에 서서 머리만 물 위로 내놓았다. 거기서 쉬고 뗏목으로 헤엄쳐 돌아갔다. 뗏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두통이 멎기를 기다리며 물안경을 쓴 채 바닥을 내려보았다. 그러나 피가 나서 물안경을 씻었다. 그런 다음 난 뗏목에 누운 채 손으로 코를 쥐고 코피를 막았다. 머리를 뒤로 기울이고 누우니 수백만 새들이 내 주위를 날았다.

코피가 멎고 나는 다시 물안경을 썼다. 이번엔 내 배로 돌아가서 렌치보다 무거운 놈을 찾았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해면 캐는 갈고리조차. 정기선으로 돌아가니 물은 훨씬 맑아졌다. 흰 모래 제방 위를 떠다니는 모든 것이 보였다. 난 상어가 있는지 살폈지만, 상어는 없었다. 정말 멀리 나가면 상어를 만났을 것이다. 물은 꽤 맑았고 모래는 하얬다. 뗏목에는 닻을 다는 고정장치가 있었다. 난 장치를 떼고 갑판으로 나와 장치를 들고 잠수했다. 장치 덕분에 나는 곧장 가라앉았다. 나는 관측창을 지났다. 창을 잡았지만 잡을 곳이 없어서 나는 계속 가라앉았다. 둥근 정기선 옆면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장치를 놔야 했다. 장치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내가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것 같았다. 뗏목은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중이었다. 나는 코피를 바다에 흘리며 뗏목으로 헤엄쳤다. 상어가 안 나타나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난 지쳐 버렸다.

머리통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난 뗏목에 누워 쉬다가 다시 정기선으로 돌아갔다. 슬슬 오후였다. 난 렌치를 쥐고 다시 잠수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렌치는 너무 가벼웠다. 큰 망치, 쓸만할 만큼 무거운 게 아니면 다이빙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난 렌치를 다시 장대에 감고 물안경으로 물속을 보면서 창을 내리치고 찍어댔다. 그러다 렌치가 사라졌다. 물안경으로 보니 아주 확실하게 렌치는 정기선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다 정기선에서 떨어지고는 진흙 속으로 잠겼다. 이제 하릴없었다. 렌치도 없었고 고정장치도 잃어버렸다. 난 배로 돌아갔다. 뗏목을 배에 올리기엔 너무 피곤했다. 해는 꽤 기울었다. 새들은 정기선을 떠났고 나는 뗏목을 데리고 남동쪽 모래톱으로 갔다. 새들은 내 위와 뒤에서 날았다. 정말 노곤했다.

그날 밤, 폭풍이 불었다. 폭풍은 일주일을 불었다. 정기선을 다시 찾으러 나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나한테 내가 벨 수밖에 없던 녀석은 팔만 빼면 괜찮다고 알려주었다. 난 마을로 돌아갔고 벌금 5백 달러가 선고되었다. 나중엔 다 잘 풀렸다. 그 녀석이 도끼를 들고 날 쫓아갔다고 증언한 몇몇 친구 덕분이다. 그러나 증기선에 다시 돌아가 보니 이미 그리스인들이 배를 열어젖히고 속을 비워낸 후였다. 그리스인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써서 금고를 빼냈다. 얼마나 챙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기선은 금을 날랐는데 그들이 다 가져갔다. 그들은 배를 홀라당 벗겨 먹었다. 나도 정기선을 뒤졌지만, 동전 하나 챙기지 못했다.

알고 보니 정기선은 아주 진국이었다. 사람들 말로는 정기선이 허리케인이 몰아치던 날, 하바나 항구에서 겨우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정기선은 항구에 들어갈 여지가 없었거나 항구 쪽에서 선장한테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선장은 시도라도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정기선은 폭풍과 함께 나아갔다. 캄캄한 바다에서 그들은 레베카 등대와 토르투가스 등대 사이로 만을 통과하려 기를 쓰고 달렸다. 그때 정기선은 펄에 끼었다. 방향타가 빠졌을 수도 있다. 방향키로 조종 중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뱃사람들은 그곳이 펄임을 알 방법이 없었다. 배가 멈추자 선장은 분명 밸러스트 탱크를 열어서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을 거다. 그러나 배가 닿은 바닥은 펄이었다. 선원들이 탱크를 열자 배는 후미부터 꺼졌고 앞머리까지 가라앉았다. 배에 탄 승객과 선원은 450명이었고, 그들은 내가 배를 발견할 즈음에도 모두 탑승 중이었다. 분명 선원들은 정기선이 갇히자마자 탱크를 열었을 것이고, 바닥에 닿자마자 펄은 배를 잡아당겼다. 그다음 화덕이 폭발하고 조각들이 나왔을 것이다. 상어가 없었다니 조금 웃기다. 아예 물고기도 없었다. 있었다면 맑고 하얀 모래를 배경으로 내가 봤겠지만.

지금은 물고기가 잔뜩이다. 제일 큰 것은 돔이다. 정기선은 몸체를 대부분 모래 밑에 묻었지만, 제일 큰 돔들이 정기선 안에 산다. 몇몇은 150에서 180이나 나간다. 가끔 우리도 가서 몇 마리 잡는다. 정기선이 가라앉은 곳에 가면 레베카 등대를 볼 수 있다. 지금 정기선이 있는 곳에는 부표를 띄웠다. 만 끝자리 펄이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 정기선이 있다. 배는 겨우 100도 안 되는 거리를 남기고 만을 통과하지 못했다. 폭풍 속 암흑에서 선원들은 등대를 놓쳤다. 그렇게 비가 내렸으니 레베카 등대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폭풍에 젬병이었다. 정기선 선장은 그처럼 재빨리 나아가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정기선은 늘 경로가 있고, 정기선 선원들이 방향만 맞추면 배는 알아서 가니까. 폭풍이 불던 날 그들은 자기 위치를 몰랐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다. 그래 보았자 방향타를 잃었을 테지만. 여하튼 걸프만까지 온 이상 멕시코로 가기까지 펄 말고 부딪힐 건 없었다. 그런 비바람에 갇힌다면 혹시 모를까. 결국, 선장은 선원에게 탱크를 열라고 시켰다. 그 폭풍과 빗속에선 갑판을 지키고 설 수도 없다. 모두 갑판 아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선원이라고 갑판 위에 살림을 차릴 수는 없다. 안쪽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 같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정기선은 재빨리 멈췄으니까. 내 렌치도 그렇게 모래에 빠졌다. 선장이 이곳 물속을 모르는 이상 밑에 있는 것이 펄임을 알기란 불가능했다. 최소한 바위는 아니라고만 인지했을 것이다. 선장은 함교에서만 보고 들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을 때쯤 진짜 상황을 알아챘겠지. 난 정기선이 가라앉던 빠르기가 궁금하다. 선장에게 저승길 동무가 있었을까. 선원들은 함교에서 죽었을까, 아니면 바깥에서 운명을 받아들였을까. 사람들은 시체를 못 찾았다. 하나도. 아무도 둥둥 뜨지 않았다. 그들도 구명튜브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 분명 배 안에서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 그리스인들이 다 가져갔다. 말 그대로 전부. 엄청 서둘러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스인들은 정기선을 비워냈다. 처음엔 새들이, 다음엔 내가, 그다음엔 그리스인들이 왔는데, 새가 나보다 정기선에서 얻어간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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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4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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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3차대전으로 부를 전쟁. 인류는 이 전쟁을 오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록하기엔 종이가 없고 기억하기엔 희망이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난 방공호를 나섰다. 어차피 죽는다면 바깥을 보고 싶었다. 밤마다 들리는 폭음, 멀리서 은은하게 오는 진동.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감각이 없었다. 죽더라도 고통스럽게 죽고 싶었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다 죽는 게 아니라.


  이유는 또 있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싶었다.





  '4분의 기적'.



  뉴스가 남아 있던 시절엔 그렇게 불렀다. 수십 년 전, 전쟁이 멈춘 적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도 마이애미에서도 카이로에서도 뭄바이에서도 오사카에서도. 단 4분. 4분 동안 세계는 평화로웠다. 어떤 병사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관자놀이에 총을 쐈고 방공호에 박힌 누구는 조용한 주위에 청력을 멀었다고 착각해 귀를 뜯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세계는 조용했고 그 4분은 확실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폭격으로 많은 자료가 증발했다. 무슨 이유로 전쟁이 멈췄는지 아는 사람은 죽었다. 내가 사는, 아니 갇힌 방공호는 운이 좋아 자료가 보존되었다. 알 수 있는 사실은, 50km 떨어진 한 건물이 기적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건물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포탄이 만든 구덩이에, 콘크리트 조각과 철근, 탱크와 장갑차들로 가득했다. 유리조각과 뾰족한 쇠에 방호복이 스쳐 찢어졌다. 상관없었다. 오히려 기뻤다. 드디어 죽을 수 있었다.


  건물은 조그만했다. 무너진 문에 몸을 비집고 들어간다. 연구복을 입은 시체는 이미 미라화가 완료되었다. 이 건물은 연구소인 모양이다. 방마다 박살난 현미경과 플라스크가 흩뿌려져 있다. 지하로 내려간다. 기록이 살아있는 층은 지하 7층.


  컴퓨터를 찾아냈다. 방공호에서 가져온 전력공급장치를 연결한다. 컴퓨터를 켜고 기록을 추적한다. 기적의 4분. 그날의 기록.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들은 우주망원경을 쏘아올렸다. 지구상 가장 강력한 망원경. 우주 초기 모습까지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기술을 지닌 망원경이었다. 망원경은 몇 년 동안 우주 구석구석을 찍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날, 우주선이 결과를 냈다.


  조용한 우주. 그것이 망원경이 내린 결론이었다.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과 항성과 혜성이 있었다. 그러나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측정에 따르면, 우주에 생명을 지닌 행성은 지구뿐이었다.


  그랬다. 우주에 유일한 생명이 지구 위에만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전쟁을 멈추게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우주 유일 생명을 파괴한다는 사실에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럼 누가 전쟁을 재개했을까? 아마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4분의 기적을 깨뜨린 누군가도 기록에 남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를 뒤졌다.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4분의 기적을 깨뜨린 쪽도 연구소였다. 우주에 생명이 지구에만 있다는 결과를 낸지 4분 후, 망원경이 새로운 외계 문명의 징후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안심하고 다시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뭐야, 나는 호기심을 채웠다는 안도감에 드러누웠다. 이제 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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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소설] 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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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부장


  김 부장은 조용히 살았고 죽어서도 조용했다. 김 부장 장례식은 간소했다. 살 적에도 지인이 몇 없었다. 게다가 하나뿐인 딸이 죽고 나서 더욱 연락을 끊고 살았다. 만약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딸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슬펐지만 울진 않았다. 영정사진에 두 번 절했다. 김 부장의 먼 친척과 악수했다. 부조금을 내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장례식은 처음이라 다 육개장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김 부장은 돈이 많지 않았다. 있던 돈도 딸이 죽고 정신이 나가서는 다 써버렸다. 돈이 된다 해도 이혼하고 딸마저 잃은 남자 장례식을 돌봐줄 이 누구인가. 비가 내렸다.


  김 부장은 딸을 사랑했다. 책상 위에는 딸 사진이 액자 속에 서 있었고, 회식이라고 갔다 하면 딸 자랑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야 했다. 그래서 김 부장은 더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14층에서 떨어진 딸이 아스팔트에 밟힌 지렁이처럼 으스러져 있는 모습을 봤을 때. 하필 오랜만에 정시 퇴근하는 그날, 주황색으로 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김 부장은 어깨에 양복을 걸치고 터덜터덜 돌아갔다. 한 손에는 딸에게 줄 치킨 한 마리를 든 채. 치킨은 따뜻했다. 김 부장이 방금까지 딸이었던 살덩어리를 발견하고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에도 치킨에선 흰 김이 났다.


  유서는 없었다. 하지만 일기장은 있었다. 그 일기장에도 입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루도 빠짐이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학교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다. 딸과 같은 반 '친구'들이 수사를 받았다. '친구'들은 김 부장 딸과 함께 화장실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 돈을 '빌리'는 친한 사이였다. '친구'들은 그러나 풀려났다. 물증이 없었다. 교장은 교양인답게 학교가 조용해지기를 바랐다. 교육청도 구청도 교양이 넘치는 곳이었다.


  사건은 흐지부지 끝났다. 살인사건도 아니고, 자살을 열심히 수사할 필요가 있을까? 친구들도 모두 딸과 잘 놀아 줬는데 말이다. '친구'가 많은 학생이 무엇이 아쉬워 죽는다는 말인가? 그렇다. 아마 아버지가 잘 놀아주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 밑에서 혼자 자라서 정신발달이 좀 늦지 않았을까. 원래 그 나이대는 예민하다잖아. 동네 아주머니들은 찜질방에서 맥반숙 계란을 까먹으며 앞으로 낮아질 집값을 걱정했다. '친구'들은 전부 훈방 조치되었다. 시의원 아들인 김 군이 제일 먼저 나왔고 그 다음엔 중견기업 이사 딸인 박 양이 나왔다. 나머지는 경찰의 합리적이고 법치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사건이 여론에서 잊혀지고 나서 나왔다.




  김 부장은 경찰서 앞에서 1인시위를 하다가 쫓겨날 무렵에 정신이 나갔다. 김 부장은 재산을 집만 남기고 처분했다. 사내 서점에서 목격된 김 부장은 일본어 회화책을 고르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다른 가족처럼 외국으로 이민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밖에 김 부장은 점심시간 사무실에 남아 포장지 싸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이면지에다 각종 설계도를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컴퓨터로 삽과 곡괭이를 고르다가 들키기도 했다.


  "뭐라도 배워야지."


  참견쟁이 유 대리가 묻자 김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다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김 부장은 일본어를 중얼거렸다.


  하지메마시떼. 와따시노 나마에와...



  김 부장은 그렇게 일본어를 두 달 넘게 연습하더니 연차를 냈다. 평소 소처럼 일하던 김 부장이기에 사장도 휴가를 말리지 못했다. 연차를 낸 김 부장은 사라졌다. 문자를 보내도 반응이 없었다. 전화를 하니 해외전화로 연결되었다. 일본에 간 듯싶었다. 일본에 유명한 정신과 의사라도 있다면 모를까. 하필 성수기에 가서 돈은 돈대로 깨지고 시끄러울 텐데. 우리는 한 손에 커피를 쥐고 떠들었다.


  김 부장은 연차에 맞춰 돌아왔다. 생각보다 멀쩡했다. 오히려 평화로웠다. 저러다 총기난사라도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했다. 사장이 시켜서 나와 유 대리가 김 부장네 집으로 갔다. 문을 두드렸다. 김 부장은 문도 열지 않고 답했다.


  “지금은 안 돼. 내일 출근한다고 사장님한테 전해 줘.”

  “사장님이 얼굴도장 찍고 오라고 하셨는데요.”

  “미안해. 지금 울고 있어서.”


  우리는 하릴없이 돌아왔다.


  일본 여행이 정말 득이었는지 김 부장은 괜찮아졌다. 말도 잘 했고 일도 잘 했다. 사고 칠까 봐 걱정하던 사원들도 점점 평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김 부장은 딸을 죽게 만든 '친구'들한테 기념품을 선물했다고 들었다. 아니, 아무리 착해도 저건 아니지 않나? 꼰대 사장마저 어이없어했다. 우리야 김 부장이 평상시대로 일한다면 기념품을 주든 돈을 주든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김 부장한테 감사했다. 이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일본 가서 깨달음이라도 얻고 용서를 배웠나 싶었다.


  하지만 하늘은 착한 사람을 싫어했다. 김 부장은 얼마 되지 않아 암 판정을 받았다. 김 부장은 바로 퇴사했고 두 달 만에 죽었다.


  장례식을 간 다음 날, 김 부장 친척한테서 전화가 왔다. 고인 소지품을 정리하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토요일에 김 부장이 살던 집으로 갔다. 나와 그 친척은 짐을 정리했다. 회사 서류나 물건이 있으면 내가 따로 뺐다. 재산을 처분했다더니 잡동사니가 많았다. 반나절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다.


  일본 지도 세 장(김 부장은 일본 북부를 여행한 듯했다), 손전등, 위장 크림, 장화, , 두꺼운 장갑, 더 두꺼운 보호복, 나침반, GPS, 비상 식량, 침낭, 시계, 은빛이 나는 조그마한 상자, 끌과 공작용 칼, 줄자, 핀셋.


  “저 은색 상자는 뭘까요?”

  “뭔지는 모르는데 색이 납이랑 비슷하네요. 제가 화학 회사에서 일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서랍에서 주황색 탐지기가 나왔다. 무얼 탐지하는 기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위치를 켜자 조금 치직대는 소리를 냈다. 뭘 탐지했길래 그런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반응한 것일까? 하지만 이미 토요일을 다 보낸 나는 회사 것만 챙겨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에서 조금 신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 친하게 지낸 김 부장을 어이없게 잃은 데 대한 씁쓸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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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소설] 우주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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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비밀을 알아냈다. 그 비밀이란 원래 이 세상은 신이 만들어낸 실험장이라는 것이다. 신은 우주 안에 지구와 생명체들을 만들고 거기서 실험을 벌였다. 나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신이 전화를 받았다. 신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늘었다. 나는 따질 사이도 없이 신을 몰아세웠다.

 

우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지?”

그러니까, 막 죽게 내버려둔 건 아니고요.”

 

신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신은 이공계 대학원을 다니는 대학원생으로, 교수 연구를 보조할 목적으로 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원래는 몇 억 년만 돌리고 폐기처분할 생각이었지만 우주에 정이 든 데다가 논문 심사에 제출할지도 몰라서 연구실 구석에 보관 중이었다.

 

실험 주제는 뭐지?”

, 그게자원이 모자라면 생명체들이 얼마나 싸우고 진화할지.”

 

나는 화가 났다. 어릴 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놀림 받으며 살았고, 대학에 와서는 등록금을 내려고 잠이 모자랄 만큼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지금은 중소기업에서 상사한테 손가락질 당하면서 산다. 임신이라도 할까 봐 아내랑은 함부로 잠도 못 잔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픈지 알아? 지금도 어딘가에는 식량이 없어서 아이들이 굶어 죽고 석유를 얻으려고 전쟁을 벌이고 여름만 되면 전기세가 치솟는다고!”

, 미안합니다.”

내 말 잘 들어. 이제부터 이 우주도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만들어. 혹시 지구 말고 다른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만.”

 

나는 신한테 명령했다. 그럼 지구를 풍족한 행성으로 바꿔 달라고. 지하자원과 식량이 풍부하고 공기와 물이 깨끗한 행성으로 만들어 달라고. 신은 연구를 망칠까 봐 핑계를 댔지만 나는 겨우겨우 신을 설득했다.

 

, 알겠습니다. 얼마나 좋은 행성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실험을 하려면 아무것도 안 건드린 대조군이 있다지? 이 실험에도 대조군 우주가 있지?”

그 대조군 우주보다 좋게 만들어 줘.”

 

신은 머뭇거렸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이 답했다.

 

죄송한데, 그쪽 우주가 대조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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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숫가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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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에 겪은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별장에 있었다. 대한민국에 별장이라니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 친구 중 하나가 돈이 많았다고 해 두자. 호숫가 별장은 누워만 있어도 행복했다.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사르르 소리를 냈고 멀리서 철새들이 울었다. 밤엔 벌레들이 울었다. 우리는 장작에 불을 붙이고 통기타를 쳤다. 타닥타닥. 마지막 잔열을 둘러싸고 남녀가 끌어안았다.

모두 잠든 새벽이었다. 둔탁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발걸음으로 거실로 갔다. 거실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병을 꺼내 입에 댔다.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운 거실 구석에 사람 형체가 있었다. 사람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그 모습. 나도 모르게 생수병을 집어던졌다. 10초도 되지 않았지만 10시간 같았다. 불에 탄 듯 갈라진 얼굴은 흰색 마스크를 썼다. 몸은 나보다 몇 배는 컸다. 오른손은 기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굳은 피가 도끼날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울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저앉기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냉장고에 기대 다음을 기다렸다. 살인마는 그러나 제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점잖은 목소리였다.

저는 살인마입니다. 하지만 살인은 하지 않습니다.”

 

살인마와 나는 식탁에 앉았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마셨다. 살인마는 가면을 살짝 들어서 입을 대고 마셨다. 나는 보리차를 들이켰다. 어쩌면 우유였는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기억이 흐릿하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살인마는 캠핑장에서 죽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강가에 놀러갔다가 물에 빠졌다. 하지만 캠프 지도자들이 사랑을 나누느라 소년의 외침을 흘러들었다. 소년은 죽었지만 어두운 기운이 소년을 되살렸다. 소년에게 남은 건 증오뿐. 애초에 어두운 힘이 소년을 되살린 목적이 살인이었다.

하지만 살인은 어려웠다. 첫 해 소년은 캠핑장에 온 손님 하나를 죽였다. 도끼로 허리께를 후려친 다음 손을 상처에 넣어 내장을 꺼냈다. 손님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다 죽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캠핑장은 발길이 끊겼다. 경찰들은 수색작업을 벌이며 온갖 곳에 노란띠를 둘렀다. 기자들은 헬리콥터까지 띄우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살인마는 산으로 도망쳤다.

어두운 힘은 속삭였다. ‘살인은 아무도 모르게 해야지.’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해도 실종자가 발생하는 것은 같았다. 소년은 어두운 힘을 설득했다. 결국 어두운 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살인마와 어두운 힘은 사람을 죽일 쉬운 방법을 연구했다. 그들은 통계를 냈고 신문기사를 뒤졌고 종일 토론했다.

결국 그들은 사실을 찾아냈다. 캠핑장에 오는 것이 오지 않는 것보다 통계적으로 사망률이 높았다. 고속도로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날 확률, 캠핑장에서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거나 야외에서 놀다가 세균에 감염될 확률을 다 합치면 캠핑장에 오지 않아서 죽을 확률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들은 방침을 바꿨다. 살인마는 열심히 쓰레기를 줍고 어두운 힘은 해충을 쫓아냈다.

도끼보다 녹슨 못이 파상풍에 걸릴 확률이 높죠.”

보리차가 썼다. 우유였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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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츤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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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평양. 일본에서 멀지 않은 한 섬나라. 일본과 가까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섬나라의 지도자는 츤데레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국민들이 사랑한 그녀. 사랑했기에 그녀가 다음 지도자가 되어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매주 국민들한테 츤데레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대강 이런 식이다.

 

국민 여러분! 수출사정이 안 좋아져서 세금을 올리기로 했어. , 절대 우리 경제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 뭘 보는 거야!”

 

군 복무 기간이 늘었다고? , 나랑 상관없잖아? 나는 지도자층이라 복무 의무가 없다고! , 그렇다고 내가 군인들 처우를 개선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야! 뭘 자꾸 추측성 기사를 쓰는 거야, 이 나쁜 언론같으니! 변태!”

 

국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의심이 싹텄다. 수출사정이 좋아졌는데 왜 세금이 다시 내려가지 않는가? 군인들 처우는 왜 개선되지 않는가? 추측성 기사인데 왜 증거가 쏟아지는가?

 

의원과 권력가들이 지도자를 찾아갔다. 그들은 해명을 원했다. 지도자는 차를 마시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푸풋 뱉었다. 그러더니 침대에 드러누웠다.

 

변태변태변태! 남의 침실에 들어오다니! , 하지만 너희들이 원한다면 내가 해명을 해 줄 거라고! , 딱히 국민여론이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니깐

 

하지만 때는 늦었으니, 야당 당수는 순애보 히로인이었기 때문이다. 밀고 당기는 츤데레에 지친 국민들은 순애 당수를 밀어주었다. 결국 국회에서 높은 투표율로 지도자는 교체되었다. 지도자는 눈물을 그렁이며(절대 흘리지는 않았다. 지도자는 늘 그랬다. 글썽이되 흘리지 않기) 자택으로 떠났다.

 

그렇게 섬나라는 좋아졌을까? 그랬다. 군인들 처우는 개선되었고 세금은 절약을 통해 합리적으로 나아졌다. 실업률은 내려갔고 부동산 값도 올랐다. 하지만 국민들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렇다 무언가 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빠진 것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정신과 의사들과 문화평론가들은 불행히도 그 빠진 것을 알아내고 책에 남겼다.

 

국민들은 츤데레를 그리워했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츤데레 지도자는 복권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순애가 왜 싫은가? 외신이 인터뷰한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뻔하잖아요. 저런 사람은 뒤가 구리겠죠. 나중에 어둠의 길로 빠지거나요. , 아무튼 저희가 지도자 시절이 좋다는 건 아니에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츤데레는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들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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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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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말하셨다.

세상은 해가 아니라 비로 완성된다.”

나는 그 의미를 전혀 몰랐다. 아버지도 내가 이해하리가 기대하지 않으셨다. 그저 매년 명절마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친척들한테 나를 소개했다. 내가 가업을 잇기 바라셨다.

 

나는 회계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시험문제는 지옥처럼 어려웠다. 실패인가? 내 지능은 수도권 대학으로 끝인가? 그때 아버지가 날 불렀다.

무엇보다 멋진 직업. 빛나는 대신 후려치는 직업.”

처음에는 무슨 무술가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시외 사무실로 나를 데려갔다.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입력하고 사람 키만큼 두꺼운 철문을 열어야 들어가는 곳. 햇빛이 비추지 않는 지하에 아버지의 직장이 있었다.

회계는 세상을 관리할 뿐, 발전시키지 못한단다. 흠집을 다듬는 사람은 결코 새 보석을 만들지 못해.”

아버지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옆 소파에 앉았다. 곧 아버지가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신이었다.

적어도 겉모습만 보면 그랬다.

 

“20년 전부터 시작했다. 고향 아는 형님 일을 물려받았지. 처음엔 놀랐어. 하지만 이건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아버지는 자기의 업적을 자랑했다. 신발끈이 더 자주 풀리게 하기. 운동장에서 찬 공이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게 하기. 라면을 끓이는 사람이 가스불을 잊게 만들기. 버스카드를 찍으면 기계가 한 번은 다시 대주십시오라고 말하게 만들기. 우산 쇠살 사이에 머리카락 끼게 하기.

 

짜증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봤니?”

. 행복하겠죠.”

하지만 무덤덤하고 죽은 것 같겠지. 나무늘보처럼.”

 

아버지는 새 일을 시작하셨다. USB 꽂는 방향 헷갈리게 하기. 공인인증서 접속 오류내기. 인터넷에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면 이미 만료된 페이지입니다를 띄우기.

 

애덤스는 이익을 보고자 하는 마음,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세상을 발전시킨다고 했단다. 하지만 아들아. 그들은 모두 틀렸다. 세상은 짜증으로 발전한단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 일을 물려주셨다. 몇 년 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요즘 나는 꽤 보람찬 삶을 산다. 휴대폰은 절대 와이파이가 한 번에 잡히지 않게 하고 있다. 탄산음료는 어쩌다 한 번씩 아무 예고 없이 넘쳐흐르게 하고 있다. 특히 사격훈련에서 탄피 숨기는 일은 어찌나 재미있는지. 처음엔 아버지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악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버지, 그리고 나는 신이 틀림없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서 신을 짜증나게 했으니, 나도 인간들을 짜증나게 해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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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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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만 해도 귀신을 보는 사람은 적었다. 무당들, 심령술사들, 정신병자들.

하지만 그날부터 귀신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해가 지고 밖이 어둑해지면 그들은 나타난다. 창백한 피부, 까뒤집힌 눈, 풀어헤친 머리칼. 첫날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경찰력과 군사력이 총동원되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사람들은 문을 잠갔고 창문을 가렸다. 하지만 귀신들은 문과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공포의 연속이었다. 비명 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주식시장은 무너졌다. 이론물리학 책은 불탔고 민속신앙이 활개를 쳤다. 혼령을 부정하는 모든 종교는 무시당했고 무신론은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새벽 새가 울면 돌아갔다. 그리고 해가 지면 돌아왔다. 매일 이랬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적응했다. 귀신은 최소한 물리적인 힘은 없었다. 컵을 엎지르거나 사람을 넘어뜨리지는 못했다. 까뒤집힌 눈은 안 쳐다보면 그만이었다. 풀어헤친 머리칼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목욕을 하거나 섹스를 할 때 좀 불쾌하긴 했지만 그들은 프라이버시나 알몸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두자. 시민단체와 소수 정당이 외친 메시지는 급격히 퍼졌다. #투명하지않은공기일뿐. 무시하자. 무시하고 생업에 복귀하자. 기업연합과 보수정당도 열심히 외쳤다.

 

작년에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귀신을 차로 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차에 치인 건 귀신이 아니었다. 사람이었고 운전자의 전 여자친구였다. 운전자는 피해자가 귀신 놀이를 즐겼으며, 그날도 귀신인 척 했기에 그냥 페달을 밟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CCTV가 근처에 있었다. 모든 배심원과 판사는 여자가 귀신 흉내를 내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징역 15년으로 기억한다.

 

귀신을 반기는 집도 많았다. 우연히 자기 집에 들어온 귀신이 돌아가신 어머니인 집들. 눈이 까뒤집혔지만 죽은 가족을 본 그들은 행복했다. 가족, 친구, 남편, 부인, 자식이 그리운 사람들은 길을 나섰다. 생전 사진을 올리며 귀신을 찾았다. 아예 돈을 받고 원하는 귀신을 찾아 주는 서비스가 횡행했다. 귀신 사진을 찍어 올리고 귀신과 사진을 대조해서 찾는 앱을 개발한 개발자가 돈방석에 앉았다. 혹시 미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경찰은 실제로 미제 살인사건 피해자 귀신, 수배자 귀신을 찾아냈다. 하지만 귀신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왜 아무 말도 없을까? 눈길도 주지 않고 왜 돌아다니려고 할까?

 

지난 달 나는 이상한 제보를 받았다. 그 사람은 귀신이 자기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 집에 가서 며칠 묵었다. 정말 그랬다. 귀신은 이 집 근방에는 얼씬도 안 했다. 집주인은 불안했다. 귀신이 찾아오던 초기에는 기뻤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따로 노는 기분이 든다면서 몸서리쳤다.

 

조사 결과 귀신이 접근하지 않는 사람이 꽤 되었다. 나는 그들을 귀신 면역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불안해했다. 왕따 피해자들처럼. 사람들은 어느새 귀신을 바랐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누군가를 찾아가지 않는 것이 더 괴롭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바꾼 것이 아닐까?


며칠 전부터 내 근처에도 귀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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