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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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중간, 고독한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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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다 보면, 특히 케이블 방송이나 뉴스 채널을 보면 프로그램 사이마다 기부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유니세프나 난민기구에서 만든 것인데요.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와 여성들을 보여줘서 여러분의 죄책감을 유도합니다. 아이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애잔한 바이올린 선율이 슬픔을 더합니다. 해설 목소리는 화룡점정으로 기부 전화번호를 불러주죠.

 

물론 그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저도 기아와 전쟁, 난민이 없는 세상을 원하죠. 이런 일들은 세상에 다시 없을 비극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굶지도 죽어가지도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학교는 줄을 잘 세웁니다. 시험을 보고 성적이 나오면 점수를 바탕으로 등수를 매깁니다. 등수가 높을수록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대학교에 가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회사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면이런 식으로 계속되죠. 많은 책과 강의와 사상가들은 이런 등수 매기기를 비판해 왔습니다. ‘사람은 다원적이다.’, ‘다양성을 생각해야 한다.’든가. 많이 들어보셨을 테죠.

 

저도 등수 매기기의 단점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중간 놓치기입니다. 말 그대로 등수 시스템에서는 중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죠. 꼴등도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꼴등은 늘 멸시받고, 무시당하고 차별당합니다. 그러나 중간 등수도 다른 방법으로 불행해집니다. 동정도 못 받고, 그렇다고 뻐길 만큼 등수도 높지 않습니다. 근처 사람에게 불평해 봤자 배부른 소리라며 무시당하죠. ‘넌 그래도 하위권은 아니잖아.’

 

전 이런 무시당하는 중위권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경제성장을 이뤄냈다가 하락하는 한국 같은 나라는 더욱이요. 지금 젊은 세대는 경제 내림세로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세를 한탄하면 돌아오는 소리는 비슷하죠. ‘옛날에는 이것보다 더 심했어.’, ‘옛날에는 다 굶고 살았어. 지금은 굶지는 않잖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거나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포탄에 벌벌 떨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위로받을 필요가 없을까요? 옛날보다 잘살게 되면 불평불만을 하나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제가 부모님, 조부모님보다 건강하면 병원에 가지도 못 하나요?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아픈 일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 넘어지는 것에서부터 상사에게 잔소리 듣기,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까지 크기와 종류는 다양합니다. 인류는 그런 고통을 없애려 했고, 그 결과 지금의 문명을 이뤘습니다. 농사법을 발전시키고 전기를 발명하고 민주주의와 기타 정치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이의 목적이 일치하지는 않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인류 문명 역사는 아마 덜 아픈 세상을 만드는 역사라 불러도 좋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은 아픕니다. 아프면 치료해야 합니다. 아프지 말아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위권은 늘 고독합니다. 하위권은 동정을 받습니다. 상위권은 권위를 누립니다. 그러나 권위를 누리기엔 낮고, 동정을 받기엔 높은 중위권은 불만을 말할 곳도 없습니다. 입을 열었다가는 양쪽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너는 그 정도면 다행인 줄 알아라.’, ‘좀 더 노력해서 올라오면 되잖아.’

 

다시 말합니다. 아픔을 말할 자격 따위는 없습니다. 자원이 한정적일 때 그 자원으로 급한 사람부터 처리해야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입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아픔을 말하지 못하면 비뚤어집니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비아냥댑니다. 말해도 듣지를 않는데, 왜 말을 하겠습니까. 주먹을 휘두르지. 저는 지금 만연한 혐오 정서 일부는 등수 매기기 문화에 차별적 동정이 결합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문제를 던져놓고 답을 하지 말자니, 참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어쩌면 고통과 설움에 등급을 매기지 않는 것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투덜댈 때, 그 투덜거림이 들어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보다 그냥 인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고독한 중간을 없애는 시작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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