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었다.’ ‘유익했다.’
사실 이 두 문장이면 충분한데 왜 학교에서는 독후감을 길게 쓰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이라도 재밌다면 모를까 교과서에나 나오는 지루하고 뻔한 책을 읽고 어떻게 독후감을 쓰라는 말입니까.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습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만큼 쓰기 싫은 글을 억지로 쓰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먹기 싫은 음식도 양념을 치거나 튀기거나 구우면 먹을 만하듯이 억지로 쓰는 글도 약간의 노하우만 있으면 쓸 만해집니다. 백지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연습만 하면 1시간에 A4 두세 장짜리 독후감을 쓸 수 있습니다. A4 두세 장이면 200자 원고지 20장을 넘는 양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시간을 더 투자하면 몇 십 장짜리도 거뜬합니다. 덜 힘들고 더 빠른 독후감 비결을 알아봅시다.
준비물
독후감을 쓸 책
펜
종이
제 0단계 : 부담 내려놓기
막힐수록 돌아가라. 글은 요가와 같습니다. 땀이 나도록 뛰는 달리기가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작업입니다. 어깨와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글은 나오지 않습니다. 친구와 카페에 앉아서 커피 몇 잔 마시면서 하는 대화를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나올 겁니다. 그만큼 편하고 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긴장하면 막힙니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싸는’ 것에 가깝습니다.
독후감 하면 생각나는 질문들 :
이 책의 주제는?
이 책이 주는 감명은?
이 책의 교훈은?
이 등장인물/소품이 상징하는 것은?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독후감을 써야지, 문학평론을 쓰면 안 됩니다.
제 1단계 : 물꼬를 트기
여러분은 방금 책을 다 읽으셨습니다. 이제 책을 떠올려 보세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오히려 사소할수록 좋습니다. 표지가 초록색이었다든가, 등장인물이 짜증났다든가, 맞춤법이 틀렸다든가, 삽화를 잘 그렸다든가,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든가, 읽다가 너무 졸렸다든가. 그저 편하게,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떠올리세요. 도중에 딴 생각이 나도 물리치지 마세요. 대부분 그런 딴 생각도 다 이유가 있어서 난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리처드 세인트 존의 <돈없고 빽없고 운이 나빠도 리치(RICH)>라는 책입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했는데, 경제·경영 코너에 있으면서도 샛노란 표지가 눈에 띄어서 집게 되었습니다. 책 모양도 다른 책과 비율이 좀 달랐습니다. 넘겨보니 많은 그림과 표들이 파란색이어서 시원시원했죠.
물론 여기서 생각한 내용은 독후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에 시동을 걸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생각은 ‘생각나라!’한다고 바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예열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동차처럼 시동을 걸고 엔진을 조금 덥힌 다음에야 1단 기어를 넣고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동조차 걸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조금만 머리를 굴려 봅시다. 생각이 나면 바로 종이에 적습니다. 하지만 노트 필기 하듯이 똑바로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큼직큼직 쓰셔도 되고 그림으로 그려도 됩니다. 딴 생각이 나면 딴 생각도 한 번 적어 봅시다. 나중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제 2단계 : 한 문장 찾기
어느 정도 책을 떠올렸으면 독후감에 필요한 단 한 문장을 써야 합니다. 단 한 문장이면 됩니다. 기억에 남는 책 문장도 되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문장도 됩니다. 책을 집자마자, 독후감 과제를 받았을 때를 한 문장으로 표현해도 괜찮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의 감상도 괜찮습니다. 아까 적은 느낌에서 따 와도 좋고요.
이 책 괜찮네.
이 책 후졌어.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이 재미없는 책으로 무슨 독후감을 쓰라는 거야.
스토리가 너무 억지인데.
1단계가 생각의 물꼬를 텄다면, 2단계는 생각의 씨앗을 심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더 깊고 넓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리치>를 읽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성공하는 비법은 단순할지도 몰라. 하지만 지키지는 쉬울까?’ 그 책은 성공한 사람들을 다수 인터뷰한 다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정리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제 3단계 : 쏟아내기
3단계는 이전 단계보다는 조금 힘듭니다. 하지만 전혀 힘 안 드는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2단계에서 한 문장을 쓰셨다면, 이제는 부연 설명을 하셔야 합니다. 왜, 어째서 그 문장인지 털어놔야 합니다.
예) ‘이 소설은 스토리가 엉망이네.’
주인공이 바보 같아.
등장인물이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 같지 않은데
고증이 어긋났어.
논리적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싸는’ 겁니다. 그저 마음에서 쏟아내야 됩니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소리 내어 말하면 좋습니다. 일부러 느낌을 말해 보세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근거는 나중에 찾고, 틀렸다면 나중에 고치면 됩니다. 공책에 번호를 1부터 100까지 쓴 다음 모든 느낌과 생각을 100번까지 적어 보세요. 10번을 넘기고 막힌다면 역시 아무거나 쓰세요. 딴 생각, 상관없는 생각, 다른 주제에 대한 생각도 좋습니다. 아까 생각을 자동차에 비유했죠? 자동차는 도로를 따라서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달려야 되지만, 생각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온갖 방향으로 온갖 속도로 달려도 됩니다. 물론 나중에 정리해야죠.
(2단계와 3단계는 순서를 바꿔도 좋습니다. 생각을 잔뜩 쏟아낸 다음 거기서 하나를 골라서 글을 써 나가는 것이죠.)
제 4단계 : 설계하기
어느 정도 내용이 모였으면 그 내용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모든 글에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대부분 짧게 표현이 가능합니다. 주제는 나무의 줄기이고, 모든 가지는 이 줄기에서 뻗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리치> 독후감의 주제를 ‘성공비결은 뻔하지만, 그만큼 지키기 어렵다’로 정했습니다. 주제를 정한 다음에는 아까 생각한 내용들로 부가 내용을 채웁니다. ‘성공비결은 뻔하지만, 그만큼 지키기 어렵다. 사실 그 내용들은 어느 책에서나 볼 만한 내용들이 아닌가?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했다니 신뢰가 가기는 한다. 뭐,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성공한 이유를 몰라서 왠지 그럴듯한 대답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도 저렇게 성공하고 싶다. 돈도 좀 많이 벌고, 조용한 집에서 사는 게 내 꿈이야.’
글은 크게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됩니다. 서론은 일단 내버려두고, 본론을 채웁니다. 독후감의 결론은 ‘이래야겠다’나 ‘조금 잘못된 것 같다’, ‘앞으로가 기대된다’ 등 자신의 의지나 지적, 기대 등을 나타냅니다. 이 역시 지금은 채울 필요 없습니다.
제 5단계 : 제목, 서론, 결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제목도 글의 일부입니다. 제목 잘 짓는 것도 실력이죠. 제목은 너무 쉽게 지어도 됩니다. ‘~를 읽고 나서’도 진부하지만 엄연한 제목이죠. 색다른 것이 좋다면 아까 1단계에서 쓴 딴 생각에서 가져와도 됩니다. 아니면 지금 바로 옆에 있는 물건을 살펴보세요. 그 다음 그 물건이나 딴 생각과 독후감을 연결 짓는 겁니다. 지금 제 옆에는 카페에서 산 커피 잔이 있습니다. 이것과 <리치>를 연결해 봅시다. ‘성공의 비결’과 ‘커피 잔’이라. 사람들은 거의 매일 커피를 마십니다. 점심시간만 되면 손에 커피를 든 사람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죠. <리치>에서 소개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비결들은 대부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인내하고, 새로운 생각을 고민하고, 열정을 쏟으라고 하죠. 그럼 제목은 ‘점심 후 커피처럼 성공하기’로 하고, 서론은 ‘커피처럼 흔하지만 결국 당연하고 본질적인 성공 비결’이라고 쓰면 좋겠네요.
결론부는 수미상관법을 쓰면 멋져 보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결판을 지어야죠. 서론부와 제목을 마지막에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결론에는 ‘나는 커피를 늘 마실 것이지만, 성공 비결은 안 지킬지 모른다.’나 ‘수많은 카페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성공 비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같은 문장을 써 보겠습니다.
제 6단계 : 진짜로 쓰기
여러분이 장편소설이나 책 한 권짜리 독후감을 쓰지 않는 이상, 너무 자세한 설계는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글은 설계와 실제가 다른 경우가 흔합니다. ‘이렇게 쓰면 되겠지?’ 하고 덤벼들었는데 써 보니 내용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쓰다가 더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싸는’ 것을 설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실제 유명 작가들도 이성보다는 직감과 순발력을 믿고 쓰는 분들이 많고, 그렇게 써야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 작가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글이 그런 특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종이를 펼쳐놓고, 옆에는 설계를 가져다놓고 써 보세요. 웬만하면 멈추지 마세요. 쓰다가 삼천포에 빠지지만 않게 집중하시고, 그 외에는 글이 흘러가게 두세요. 초반에는 책을 대충 설명해 보세요. 누가 썼고, 대충 어떤 내용이고. 설계보다는 자세히 써 보세요. 바로 앞 문장을 설명해주는 사례, 부가 설명을 써 보세요. 전 문장과 연결이 되도록 써 보세요. 쓰다가 막히면 5단계처럼 바로 옆에 있는 사물이나 딴 생각을 넣고 버무려 보세요. 대학교 2학년 때 독일 시인 릴케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문학은 아가리다.’ 독후감은 논문이 아니니 여러분의 ‘아가리’를 발휘해 보세요.
제 7단계 : 고치기
다 썼으면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싼’ 다음에는 닦아야죠. 맞춤법에 어긋나는 곳은 없는지, 어느 문단이 비정상적으로 크거나 작은지(크다면 잘라내고 작다면 조금 궁리해서 다른 내용을 쓰면 됩니다), 제목이 좀 생뚱맞은지. 이 방법은 일단 쓰고 보는 방식이기 때문에 고치는 데에 노력을 좀 줘야 됩니다. 실제로 쓰는 시간보다 고치는 데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한 번 원고를 쓰면 죽어라고 고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과장 좀 섞어서 잘 고치는 사람이 잘 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빨리 독후감을 제출하고 놀아야 하니까 엇나간 부분만 고칩시다. 단어 단위로, 글자 단위로 고치는 일은 하루키 씨가 하게 두고요.
이 7단계는 많이 부족한 방법이고 실제 작가님들은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조금 연습하고 개량한다면 더 길고 좋은 글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글을 잘 쓰고 싶은 설찬범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