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글쓰기와 닥터후, 엑셀, 통계학, 무료프로그램 배우기를 좋아하는 청년백수의 블로그
창작론 (3)
타로카드처럼 스토리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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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면 굶어죽기 딱 좋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굶어죽기 좋은 시대가 온 것이죠. 그러니 안심하고 글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농담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줄거리를 원합니다. 레디메이드 로맨스를 찍어내던 국내 방송국은 넷플릭스라는, 어쩌면 당연한 시대의 흐름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있습니다. 책으로만 보던 만화는 인터넷에 뿌리내리고 웹툰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종이만화보다 커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글이 줄거리를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커진 줄거리 시장에서 떨어지는 콩고물로 글이라는 장르가 연명, 아니 부활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창작에 관심이 있다 보니 여러 작법서를 읽습니다. 그중에서 오쓰카 에이지라는 사람이 쓴 작법서가 눈에 띕니다. 작법서가 아니라 창작서라고 해야 할까요? 오쓰카 에이지의 저서는 표현보다는 줄거리와 인물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오쓰카 에이지(오오츠카 에이지)는 <다중인격 탐정 사이코> 등의 만화 줄거리를 집필한 스토리텔러이자 여러 평론서를 쓴 평론가입니다. 국내에 출간한 책은 대부분 평론서가 아니라 작법서인데 실제로 창작교실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다만 <다중인격 탐정 사이코>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까지 고려된 작품이라기엔 평가가 너무 안 좋아, '이 사람은 정말 줄거리를 가르치는 게 맞나' 싶은 비판도 듣는 모양입니다. 저는 <스토리 메이커>로 처음 오쓰카 에이지를 접했습니다. 그 책은 프로프의 민담이론이나 조지프 캠벨의 신화연구에 바탕을 두고 줄거리 짓는 법을 알려줍니다. 한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해체와 재구성





  <이야기 체조>라는 책은 말 그대로 이야기 만드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스토리 메이커>가 여러 이론으로 우려낸 와인이라면 <이야기 체조>는 이런저런 비법을 소개하는 칵테일입니다. 그중 첫 번째 방법이 해체와 재구성인데, 본인 말로는 만화 <성흔의 조커>를 집필하며 만든 설정을 응용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스토리 메이커> 끝부분에도 짧게 실려 있습니다.





  '해체와 재구성' 방법은 타로카드로 점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타로카드로도 가능합니다. 카드 24장이 필요합니다. 카드마다 용기, 행운 등 추상명사를 적습니다. 이제 카드를 보이지 않게 섞고 여섯 장을 고릅니다. 여섯 장을 배열합니다. 각각


1) 주인공의 현재

2) 주인공의 가까운 미래

3) 주인공의 과거

4) 조력자

5) 적

6) 결말


을 상징합니다. '주인공의 현재'가 '성실'이라면 성실하게 일하는 주인공을 만듭니다. 물론 추상명사라서 융통성(속된 말로 '유도리')을 발휘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성실'은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해내는 주인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실한 건 맞으니까요. 성실하게 살인을 준비하는 범죄자 주인공으로 상상해도 좋습니다. 카드가 위아래 뒤집혀서 배열되었다면 반대로 해석합니다. '결말'이 뒤집힌 '엄격'으로 나왔다면 자유롭고 온화한 부모님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오쓰카 에이지는 우치다 노부코와 그레마스를 인용합니다. 우치다 노부코는 어린이를 연구한 발달심리학자인데, 어린아이한테 카드를 보여주고 그 카드로 이야기를 지으라고 시켰습니다. 아이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죠. 노부코는 아이가 이야기를 짓는 것은 '경험의 해체와 재건을 통한 창조'로 해석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이야기와 겪은 체험을 치즈처럼 잘게 자른 다음, 그 단면을 늘어놓고 거기에 의미를 붙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레마스(알기르다스 줄리앙 그레마스)는 프랑스 기호학자인데 행위자 모델(행위소 모델)에서 여섯 행위자를 규정했습니다. 이 모델에서 오쓰카 에이지가 말한 여섯 배치가 나온 것입니다(따온 것이지 같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타로카드로도 가능하고, 꼭 24장이 아니어도 됩니다. 스스로 24가지 명사를 써도 됩니다. 우정, 복수, 질투...





엑셀로 만들어 보다








  일단 24가지 키워드를 번호와 함께 엑셀에 입력했습니다. 이 키워드를 무작위로 뽑아볼까요. 먼저 RANDBETWEEN 함수를 써보겠습니다 RANDBETWEEN 함수는 최솟값과 최댓값을 정하면 그 사이에 있는 정수값을 반환하는 함수입니다.




  함수로 여섯 값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RANDBETWEEN 함수는 말 그대로 무작위로 숫자를 반환해서 중복 숫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같은 키워드가 또 나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번 INDEX와 RANK 함수를 이용해 봅시다. 우선 RAND 함수로 난수를 만듭니다. =RAND()는 0과 1 사이 무작위 소수를 반환합니다. 무작위 소수 24가지를 만들었습니다.


  RANK 함수는 어떤 숫자가 범위에서 몇 등을 차지하는지 나타내는 함수입니다. 슬슬 감이 올 겁니다. INDEX는 범위에서 몇 번째에 해당하는 값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써 봅니다.




= INDEX(추첨할 데이터, RANK( 이번 셀에 해당하는 RAND 함수를 쓴 셀 , RAND 함수를 쓴 범위 ))


  RANK는 맨위 셀이 난수 중에서 몇 등인지 가렸습니다. INDEX는 그 등수번째에 해당하는 숫자를 가져왔습니다. 필요한 만큼 자동 채우기가 가능합니다. 무작위 소수는 전부 다르니까, 등수가 겹칠 염려는 없고 따라서 등수번째 데이터도 전부 다릅니다. 자동 채우기에서 셀 주소가 변하게 하지 않으려면 주소에 $를 넣습니다. 직접 타이핑해도 되고 블록설정 한 다음에 F4를 눌러도 됩니다.


  하지만 아예 키워드도 나타내고 싶으면 어떻게 할까요? VLOOKUP 함수가 유용합니다. VLOOKUP 함수는 우리가 찾는 열에 해당하는 셀 내용을 반환합니다.



= VLOOKUP ( 찾고자 하는 항목, 표 범위, 원하는 열의 상대적 위치, TRUE/FALSE)


  '찾고자 하는 항목'에는 RANK로 구한 숫자를, 표 범위는 번호와 키워드를, 원하는 열은 표 범위에서 두 번째 열을 차지하므로 2를 넣습니다. TRUE/FALSE는 유사 일치/정확히 일치인데 어차피 숫자라 일치하니 FALSE라고 합시다.





  카드가 뒤집힘/안 뒤집힘은 RANDBETWEEN 함수로 해결해 봅시다. 최솟값을 0, 최댓값을 1로 하고 1이 나오면 뒤집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직접 해 봤습니다.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으로 줄거리를 만든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주인공의 현재 : 절도

주인공의 가까운 미래 : 생명(뒤집힘)

주인공의 과거 : 이성(뒤집힘)

조력자 : 비호

적 : 서약

결말 : 엄격


  먼 옛날 한 왕국. 주인공은 왕궁의 기사단장으로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원칙주의자다(절도). 그러나 사실 주인공한테는 과거의 비밀이 있었다. 젊은 시절, 다혈질이고 충동적이던 주인공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이성, 뒤집힘). 그때 어느 악마가 찾아와 이 사건을 무마해줄 테니 나중에 부탁을 들어달라는 거래를 제안했고 주인공은 하는 수 없이 수락해 지금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기사단장까지 되어 과거가 가물해질 무렵, 악마가 찾아와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위협한다(서약). 악마는 어느 무고한 여성을 죽이라고 요구하는데(생명, 뒤집힘) 예언에 따르면 이 여성이 낳을 아기는 악을 멸망시킬 용사로 자라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거래내용에 따라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주인공은 호시탐탐 죽일 기회를 노리지만, 오히려 여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비춰져 동료의 도움마저 받게 된다(비호).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죽는 길을 선택한다(엄격).



  다시 읽어보면 전개에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엑셀파일을 업로드했으니 해 보시길 바랍니다. 엑셀 무작위 함수는 계산마다 답이 달라지므로 보존하고 싶다면 스크린샷으로 찍는 걸 추천합니다. 복사해서 값으로 붙여넣기하면 다시 계산되어 값이 달라집니다. 철저한 무작위에서도 줄거리가 탄생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오히려 무작위라 더 상상력이 잘 발휘되는 걸지도 모르죠.



해체와 재구성.xl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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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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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왕궁에 돌아가니 왕궁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어요. 알고 보니 어느 용사가 이미 왕궁에 와서 자기가 용을 물리쳤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러시아 학자 프로프는 러시아 민담들을 긁어모아 그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과 소설가들이 영감을 받은 <민담 형태론>은 주인공이 임무를 받아 해결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민담 형태론>이 특이한 점은 주인공의 귀환 과정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임무를 해결하면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주인공이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캐릭터 중에 ‘가짜 주인공’이 있습니다. 가짜 주인공은 말 그대로 가짜입니다. 주인공이 완수한 임무를 가로채 자기가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주인공보다 먼저 고향이나 성에 나타나 자기가 용을 물리쳤다고 하니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은 마지막 위기에 몰립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남은 ‘증거’로 주인공은 가짜 주인공을 물리칩니다. 증거는 공주가 주인공에게 준 손수건 등입니다. 이로써 가짜 주인공은 처벌을 받고 주인공은 주인공 대접을 받습니다.


  영화 <슈렉>은 가짜 주인공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늪지대에 살던 괴물 슈렉은 영주와 거래해 용을 물리치러 떠납니다. 슈렉이 용을 물리친(?) 후 공주를 데려오자 영주는 자기가 공주를 구했다면서 청혼합니다. 슈렉은 사랑을 깨닫고 결혼식장에 난입하고, 슈렉과 공주는 사귀게 됩니다. <슈렉>은 주인공이 가짜 주인공인 특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창작법은 다른 블로그로 옮겨서 쓰고 있습니다

http://iamwriti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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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가 변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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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에 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도 왕을 존경했습니다. 왕에게는 공주가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온 나라의 남자들이 공주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북쪽에서 포악한 용이 날아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질서 바꾸기는 가장 쉬울 뿐 아니라 가장 흔한 도입부이기도 합니다. 해리 포터는 얹혀 살던 해리가 호그와트 초대장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반지의 제왕은 프로도가 반지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미션 임파서블과 007은 주인공이 임무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잘 흐르던 일상이 변하는 순간 사람은 타성에서 깨어나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질서가 꼭 평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지어 질서는 질서정연할 필요도 없습니다. 북두의 권은 황폐화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켄시로가 발을 디디면서 시작됩니다. 질서는 '웬만해서는 그렇게 흘러갔을 흐름'입니다. 잘 나가던 결혼식장에 남자가 난입한다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악당에게 죽어가면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는 원래 제대로 흘러갔을 결혼식과 악당의 세계 정복이라는 '흐름'을 깨는 행위입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4는 레아 공주가 오비완에게 데스스타 설계도를 보내면서 시작합니다.


  잔잔한 질서에 조약돌이 날아옵니다. 조약돌이 떨어지며 파문을 일으키고 파문은 사방으로 퍼집니다. 독자는 과연 이 파문이 어떤 영향을 줄까, 특히 이 질서가 바뀔까 궁금해집니다. 결혼식은 과연 성사될까요? 악당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레아 공주가 보낸 데스스타 설계도로 은하제국을 막을 수 있을까요? 서론만 만든다고 본론을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질서를 바꾸면 그럴듯한 서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창작법은 다른 블로그로 옮겨서 쓰고 있습니다

http://iamwriti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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