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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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라 (1)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감상 (노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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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까지는 프로레슬링을 열심히 봤습니다. 어느 프로레슬링이냐 물으신다면, 자연히 WWE 프로레슬링이겠죠. 한때,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프로레슬링 열풍이 불었죠. 그때는 보지 않다가 뒤늦게 빠져버린 겁니다. 저는 후회했죠. 이왕이면 더락, 헐크 호건, 트리플 H, 골드버그, 바티스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날뛰던 2000년대 초반 WWE에 빠질걸 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본 최근 WWE도 재밌었습니다.


  압니다. 프로레슬링은 각본이죠. 누가 붙고 누가 이길지 다 정해진 싸움입니다. 관객과 시청자도 어린이들을 제외하면 이 사실을 압니다. 그럼에도 재밌습니다. 영화도 다 시나리오지만 재밌잖아요? 프로레슬링 회사는 이 정해진 싸움을 차근차근 만들어갑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게 하고, 둘은 각자 상대를 폄하하고 욕합니다. 그러다 한 번 만나 투닥거리면, 옳다구나 하고 몇 주 후에 있을 이벤트에 매치를 잡아 줍니다. 레슬러가 거물이거나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경기일수록 이런 준비과정은 더 길고 묵직합니다.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는 보는 내내 프로레슬링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싸우는 레슬러가 사람이 아니라 CG로 만든 거대괴수였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일본 원작 고질라는 보지 못했습니다. 98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고질라, 2014년 가렛 에드워즈 감독 고질라만 봤습니다. 일본 원작은 못 봤지만, 팬들 말을 들으니 14년과 이번 작품이 더 일본 고질라에 가깝더다군요. 에머리히 감독 고질라는 헐리우드식 재난물입니다. 괴물이 나타나고 건물이 박살나고 군대는 실패하고 주인공이 도와 겨우 이겨냅니다. 이런 영화가 관객 머리에 심는 제1목표는 '어떻게 물리칠까?'거나 '어떻게 살아남을까?'겠죠. 그 사이에 뉴욕의 역사 깊은 빌딩들이 박살나는 모습으로 눈요기를 하고요.


  14년 고질라에서도 주인공은 고질라를 없애려 합니다. 그건 고질라의 정체를 모를 때 이야기죠. 애초에 핵을 맞고도 사는 괴물을 인간이 어떻게 죽입니까? 고질라의 포지션은 영화가 진행되며 바뀝니다. 다른 괴물이 나타나고, 마지막엔 고질라가 괴물과 싸워 인류를 지켜냅니다. 고질라가 인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을 지키는 게 일이기 때문입니다. 괴물 죽이러 가는 길에 빌딩이 있든 사람이 있든 아랑곳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고질라는 지구의 균형을 맞추는 수호자가 됩니다. 인류의 수호자가 아니라. 아무리 인간이 날뛰어도 '어쩌라고' 하는 식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그래서 '너네 인간도 조심해'라고 간접 경고하는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질서를 위한다는 점에서는 타노스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죠.


  전작에서 고질라가 '나쁜 괴물'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다 부수지만 시크한 수호자'로 거듭난 덕분에 이번 후속작에서 고질라는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데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질라는 아직 인간이 고깝고 인간은 아직 고질라를 무서워하지만 아슬아슬한 공생을 유지합니다. '어휴 짜식들아 이것도 못 죽이냐'는 식으로 고질라는 괴물들과 싸웁니다. 영화다 보니 이기거나 무승부가 나고, 밀리기도 하죠. 스포일러라 말하진 않겠지만. 전작은 고질라와 비교해 개미보다 작은 인간이 바라본 고질라를 보여준다면, 이번작은 꽤 높은 시점에서 보여줍니다. 괴물들이 싸우는데 당연히 중계화면을 잘 잡아야 되겠죠. 전작에서 보여준 묵직함, 거대함은 줄었지만 실제 크기가 줄어든 건 아닙니다. 빌딩은 누네띠네처럼 부서지는데 98년 영화처럼 '와! 뉴욕 빌딩이 무너진다! 무섭지!' 같은 의도는 담기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시크하게 부서집니다. 이런 시크함이 저는 좋습니다. 대도시를 일부러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싸우는데 하필 그곳이 대도시인 것. 악당보다 재해에 가까운 고질라는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질라와 인간 사이 관계는 전작보다 깊습니다. CG기술이 발달한 건지, 제작진이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지는 모르나 고질라는 전작에 비해 더 사람 같습니다. 행동이 더 다양해졌다는 말입니다. 전작에선 움직이는 산 같았다면 이번엔 걸어다니는 거인 느낌이 더 들죠. 그래도 고질라가 죽은 주인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따위는 안 나오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이야 실망스럽지만, 영화관에서는 고질라의 그런 츤데레가 조금 맘에 들었습니다. 일반 관객한테도 그쪽이 더 어필되겠죠. 제가 박스오피스를 걱정할 처지는 아닙니다만.


  영화는 괴수 파트와 인간 파트로 나뉩니다. 이건 제가 아니라 많은 분이 나누는 기준입니다. 보기에도 뚜렷하죠. 배우는 세트장에서 찍고 괴수는 컴퓨터 그래픽 속에서 찍으니(CG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가 인간 부분이 어색하고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비판합니다. 소신껏 말하자면 전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 인간 파트는 적어도 괴수 파트를 방해하진 않았습니다. 등장인물이 무의미한 짓을 좀 하고 헐리우드식 농담 따먹기(피식 웃지도 않을)가 집중을 깨뜨리긴 합니다. 그래도 자기 임무는 잘 수행했습니다. 임무란 바로 괴수 파트 사이 징검다리가 되는 일이죠. "괴물의 신호가 XX에서 잡혔다!" 그럼 우린 괴수가 XX를 박살내는 장면을 기다리면 됩니다. "이 괴물의 약점은 YY야!" 왜냐고요?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알면 됩니다. 러닝타임 전체를 괴수 싸움으로 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을 주역으로 만들 수도 없는 각본가들은 그나마 준수한 드라마를 써 냈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볼 때는 드라마를 스킵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싸움. 이 싸움 장면은 영화 전체를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프로레슬링 회사가 몇 달에 걸쳐 쌓아올린 노력이 하룻밤 경기에서 터지듯, 고질라는 모든 것을 걸고 대판 싸웁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잘 만들었습니다. 괴수물 팬이라면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래도 좀 긴 싸움을 보고 싶었어요. CG가 돈이 많이 든다는 건 알지만요. 화면전환 없는 노컷 3분, 고질라와 괴수 대격돌! 이거 하나면 고질라 역사의 명장면으로 남을 겁니다.


  인간 측 주인공을 맡은 카일 챈들러는 피터 잭슨의 킹콩에도 나왔으니, 킹콩과 고질라를 둘 다 본 셈이군요. 아역으로 나온 밀리 바비 브라운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유명하다는데, 전 넷플릭스를 안 봐서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쪽이 더 주인공 같아요. 귀엽습니다. 지금도 성공했지만 앞으로 대성할 느낌이 듭니다. 킹콩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콩은 도대체 어떻게 얘랑 싸운답니까? 크기야 성장해서 맞추면 된다지만 핵무기도 소용 없는 괴수를 어떻게 이긴다는 거죠?





  아무튼 98년 '질라'나 괴물 물리치는 블록버스터를 기대한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14년 고질라를 안 보셨다면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스토리는 크게 상관 없지만, 전작에서 쌓은 분위기를 물려받으니까요. 어차피 이제 보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고질라 관이 속속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질라보다 몇만 배 작은 '기생충'이 메우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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