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드라마에 불만이 하나 있다면, 너무 짧다는 겁니다. 웬만한 미국 드라마는 한 시즌이 23편인데 영국 드라마는 길어야 열 편이고 짧으면 아예 두세 편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닥터후는 한 시즌에 열 편은 넘습니다.
편수도 적은데다 2016년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빼고 방영되지 않은 닥터후는 그래서 더 기대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닥터후는 4월에 시즌 10을 시작했습니다. 케미 끝판왕 클라라 오스왈드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동반자 빌 포츠와 함께하는 시즌이자, 12대 닥터의 마지막 시즌이어서 더욱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을까요. 호불호가 갈리던 9시즌부터 예고된 걸까요. 시즌 10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9시즌은 호불호는 갈렸지만 에피소드마다 내용물은 꽉꽉 찬 반면 시즌 10은 뭔가 헐거웠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닥터와 함께 모험한 빌 포츠
시즌10에서 닥터의 친구가 된 빌 포츠는 클라라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다만 배우 펄 맥키한테는 잘못이 없습니다. 연기력은 좋았습니다. 클라라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누가 들어와도 충분치 않았을 겁니다. 지난 시즌까지 클라라는 닥터와 긴밀한 사이였습니다. 9시즌에서 닥터는 클라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둘은 너무 죽이 잘 맞아서, 둘은 서로 뭉쳐서 파괴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결국 둘은 헤어지고 말았죠. 극단까지 치닫은 동반자가 헤어졌으니 어떤 캐릭터가 그 자리를 채우겠습니까. 마치 로즈 타일러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마사 존스 같습니다. 빌 포츠는 소시민 캐릭터입니다. 외계인도 처음 보고 괴물이 나오면 일일이 놀라 줍니다. 닥터와 혼연일체이던 클라라와는 방향이 다릅니다만 식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거기다 빌 포츠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습니다. 캡틴 잭은 심지어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했지만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각본이 굳이 그걸 끄집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 포츠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각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미미한데도 굳이 대사로 드러냅니다. 동성애는 괜찮습니다. 동성애를 줄거리로 삼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쁜 남자 나돌
빌 포츠보다는 나돌이 괜찮았습니다. 나돌이야말로 이번 시즌의 영웅입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에서 나돌은 바보 캐릭터로 등장했습니다. 올해부터는 무슨 멋이 들었는지 나쁜 남자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시니컬하고 유머 감각도 있는 나돌은 심지어 닥터보다 재미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시즌 종료 이후에 빌을 찾는 사람과 나돌을 찾는 사람이 비슷했습니다. 나돌이 지닌 인기를 아시겠죠.
에피소드도 조금 별로였습니다. 1화는 캐릭터와 설정을 소개하니 괜찮다 쳐도, 2화부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예전 닥터는 인간을 죽이는 로봇은 무슨 사정이 있어도 작동을 중지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인간을 적대하는 로봇을 새 종족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밖에도 차별이나 소수자를 간간이 언급합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차별, 혐오 문제가 생각이 났습니다. 차별이 아닌 것도 차별로 보고 혐오가 아닌 것도 혐오로 보는 잘못된 시선이 닥터후에 숨지는 않았나 걱정이 들었습니다.
수도승 3부작은 용두사미였습니다. 스티븐 모팻이 시작한 첫 편은 괜찮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두 편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두 번째 편도 좋았습니다. 닥터후에 흔치 않은 3부작이다 보니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3편 결말이 생뚱맞았습니다. 이 줄거리에 3편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닥터후는 각 시즌마다 시즌을 관통하는 줄거리와 떡밥이 있습니다. 이번 시즌 떡밥은 미시였습니다. 미시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착한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닥터는 미시를 방에 가두고 지켜봅니다. 시즌 초반에는 그 방만 나왔습니다. 시청자로 하여금 방에 누가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습니다. 닥터후 팬들은 떡밥과 미스터리라면 질리게 당한 지라 여러 예측을 했습니다. 의외로 많은 팬들이 미시가 방에 있다고 예상했고 맞았습니다. 시즌 중반에 어쩔 수 없이 미시가 나왔습니다. 차라리 방의 비밀을 시즌 끝까지 밀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이렇게 중간부터 비밀이 드러나고, '미시가 착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은 시즌을 유지합니다. 저만 그런지는 몰라도 시즌을 관통하는 떡밥이 시즌 중간에 바뀌다 보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11화 홍보 이미지. 50주년 두 닥터의 포즈를 마스터가 대신 취하고 있다
마지막화에는 미시가 최종 테스트를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스터가 등장합니다. 시청자는 예고편 등으로 마스터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끝까지 숨겼다면 더 충격이 컸을 겁니다. 마스터는 최고였고 마스터가 나온 마지막 에피소드도 최고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만으로 10시즌 전체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이버맨의 기원을 설명하고, 닥터후 역사상 최초로 마스터끼리 만나고, 아마 역사상 최고로 닥터가 몰락하고 심적으로 고생했습니다. 활기찬 우주/지구 구하기 모험이 아닌, 마치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했습니다. 10시즌 모든 에피소드는 마지막 두 편을 위한 예고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10시즌, 12대 닥터의 마지막 시즌이자 스티븐 모팻이 맡은 마지막 시즌은 12편으로 끝이 났습니다. 처음엔 기대했고 중간엔 실망했고 마지막엔 열광했습니다. 그래도 12대 닥터를 이렇게 떠나보내다니 아쉽습니다. 실망을 반영하듯 시청률도 큰 폭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래서야 11시즌은 발 뻗고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닥터후 팬들은 압니다. 모든 시즌 모든 에피소드가 재밌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팬이니까 재밌기를 바라지만, 54년짜리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재미가 있든 없든 역사가 됩니다. 한 서양 팬이 말했습니다. 닥터후는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집 같은 거라고. 어떤 앨범은 훌륭하고 어떤 앨범은 실망스럽지만 그 가수 작품이라고(그래도 드라마는 재밌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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