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닥터후가 재방송되고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백 편이 넘는 에피소드가 방송되었고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과연 이들 중 최고의 에피소드는 무엇일까요? IMDB 평점과 제 개인적인 의견을 섞어서 닥터후 베스트 에피소드 다섯 편을 골라 봤습니다.
5위
Human Nature/The Family of Blood
시즌 3 8, 9화
IMDB 평점 9.0/9.2
줄거리 : 닥터를 잡아 영생을 이루려는 외계인이 닥터를 쫓는다. 시간이동만으로는 도망칠 수 없게 된 닥터는 잠시 신체와 정신을 인간으로 바꾼 채 1차대전 직전 영국에 숨어서 교사로 살게 된다. 더는 외계인 닥터가 아닌 인간 '존 스미스'로 살게 된 닥터. 그러나 외계인 가족은 끝끝내 닥터를 추적해 오는데…….
Human Nature와 The Family of Blood는 아름답고 진지한 2부작 에피소드입니다. IMDB 에피소드 순위에서 상위권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명 깊게 봐서 5위에 넣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닥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닥터와 똑같이 생겼지만 몸도 마음도 인간인 '존 스미스'가 주인공입니다. 아무 능력도 특별한 지식도 없는 교사 존 스미스는 자기 주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자 당황합니다. 외계인 가족은 인간으로 변장해 닥터를 쫓고, 닥터는 영문도 모른 채 맞서 싸웁니다. 에피소드 마지막에 자신이 시공간을 여행하는 외계인이며 그 외계인만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존 스미스는 분노합니다. '그럼 난 뭐야? 아무것도 아닌 거야?'. 자기가 사라져야만 사랑하는 여인과 이웃을 구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상황. 존 스미스는 결국 자신을 희생해 닥터를 되살립니다.
이 에피소드는 전쟁이라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미성년자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현실, 불안해지는 세계정세. 1차 대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배경에서 외계인 가족은 닥터를 찾으려 마을에 포격을 퍼붓습니다. 그 포격은 마치 참호를 사이에 두고 박격포를 쏘던 1차 대전을 연상시킵니다. 외계인이 만든 허수아비 부대가 학교를 공격했을 때도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총을 장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은 학생들은 훗날 1차 대전 전장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모로 전쟁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닥터의 분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매번 싱글벙글 웃으며 조잘대던 10대 닥터. 10대 닥터가 정말로 화가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 에피소드에서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음악과 연출이 공상과학 드라마보다는 비극적인 동화에 가깝습니다. 주제와 재미를 둘 다 잡은 명 에피소드입니다.
하나 더, KBS에서 이 2부작을 방송했을 때 외계인 중 하나를 강수진 성우가 맡았습니다. 10대 닥터는 김승준 성우가 더빙해서 이 2부작은 강수진 성우와 김승준 성우가 같이 나오는 몇 안 되는 닥터후 에피입니다. 두 성우의 연기대결을 보고 싶은 성우 덕후분들도 참고하시길.
4위
The Empty Child/The Doctor Dances
시즌 1 9, 10화
IMDB 평점 9.2/9.2
줄거리 : 정체불명의 신호를 따라 1940년대 런던에 착륙한 닥터와 로즈. 독일군의 공습에 신음하던 런던에서 닥터는 이상한 소년을 만난다. 방독면을 쓴 채 '당신이 내 엄마에요?'만을 묻는 괴소년. 심지어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에 걸린 듯 소년처럼 얼굴이 방독면으로 변하고, 상황은 점차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옛날 닥터후는 '소파 뒤에 숨어서 보는 드라마'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괴상하고 무서운 에피소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The Empty Child/The Doctor Dances 2부작은 닥터후가 원래 무서운 드라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공포영화처럼 귀신이 놀래는 무서움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대단한 에피소드입니다.
언제나 방독면을 쓰고 '당신이 내 엄마에요?'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소년. 그 소년처럼 변한 사람들. 에피소드 중간에 소년처럼 변하는 의사의 모습이 호러 그 자체입니다. 눈과 입이 튀어나와 방독면처럼 변하는 장면은 특수효과가 저렴한 닥터후인데도 소름이 돋습니다. 15살이던 저한테는 정말 무서운 장면이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닥터후를 넘겨받은 스티븐 모팻이 집필했습니다. 모팻의 특징인 무서운 외계인과 감동 엔딩이 드러납니다. 유머와 있고 활기찬 러셀의 에피소드 사이에 있다 보니 더욱 감명이 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가끔은 러셀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모팻을 그리워할 차례지만요.
하나 더. 이번 2부작은 캡틴 잭 하크니스가 첫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캡틴 잭은 옛날 런던에서 장교 행세를 하며 시간 여행자들을 등쳐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열혈남아가 된 지금과는 딴판입니다. 이 2부작은 동네 아저씨 같은 9대 닥터의 노련하고 따뜻한 면모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10대 닥터는 방독면을 쓰고 나서 '당신이 내 엄마에요?' 농담을 하면서 놉니다만……. 아무튼 그 소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정체불명의 신호는 뭐였을까요? 직접 보면서 확인하시길.
3위
Midnight
시즌 4 10화
IMDB 평점 9.0
줄거리 : 휴양 행성을 찾은 닥터와 도나. 다른 곳에서 놀기로 한 도나를 두고 닥터는 행성 관광 셔틀에 탑승한다. 셔틀은 날아가던 도중 고장이 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셔틀 주위를 맴돈다. 심지어 승객 한 명은 귀신이라도 쓰였는지 다른 승객들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하고, 승객들은 조금씩 서로 의심하며 분열하는데...
시즌 1부터 시즌 4까지 줄거리를 담당한 러셀 T 데이비스. 사람들은 러셀 각본이 유치하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러셀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무거운 에피소드를 쓸 수 있습니다. Midnight 에피소드야말로 러셀이 마음먹고 무겁게 쓴 에피소드입니다. 좁은 셔틀 내부, 밖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셔틀 벽을 두들기는 존재. 사람들 말을 시간 차 없이 따라하는 여성. 더욱 공포에 질려 극단적으로 변하는 승객들.
다른 에피소드였다면 닥터가 나서서 사람들을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닥터도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합니다. 승객들은 겁에 질려 닥터를 의심하고 몰아갑니다. 다른 에피소드였다면 당연히 넘어갔을 태도나 말도 승객들은 하나하나 걸고넘어집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닥터를 범인으로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괴물(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습니다)이 나오지만 사람들이 싸우고 의심하는 모습은 다분히 현실적입니다. 깊은 설정이 없고 배경이 제한적이라서 닥터후를 몰라도 보기 좋은 에피소드입니다. 러셀이 무겁게 쓴 에피소드가 더 궁금하시면 토치우드나 Turn Left(시즌 4 11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Turn Left는 닥터후 뉴 시즌 에피 중 가장 무겁고 어둡습니다.
2위
Heaven Sent
시즌 9 11화
IMDB 평점 9.6
줄거리 : 음모로 클라라를 잃고 반 강제로 순간 이동한 닥터. 닥터가 끌려간 곳은 알 수 없는 고성이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어 보이는 성에서 닥터는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성의 여러 장치와 괴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한데…….
Heaven Sent는 Midnight와는 다른 의미로 음울합니다. Midnight는 사람들이 불신하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Heaven Sent는 아무도 없는 고성에서 혼자 고뇌하고 좌절하는 닥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말부를 제외하면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은 닥터와 클라라와 괴물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괴물은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고 클라라는 닥터 상상 속 존재기 때문에 실제로는 닥터 혼자서 고성을 헤매며 답을 찾습니다.
닥터 인생에서 최고의 단짝이라고 해도 좋을 클라라. 그 클라라를 잃고 닥터는 클라라를 죽게 만든 원흉에게 복수할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탈출구가 없는 고성에서 닥터는 조금씩 무너집니다. 그러다 닥터는 탈출구를 하나 찾게 되지만 그곳으로 탈출하려면……. 스포일러라 말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처절하고 웅장하고 눈물이 핑 돌게 합니다.
초반 고성의 웅장하고 미스터리한 모습, 다른 등장인물은 전혀 없지만 이상하게 놓이지 않는 긴장의 끈, 끝까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스티븐 모팻의 필력, 에피소드 전체를 혼자서 이끈 피터 카팔디의 미친 연기,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결말이 어우러진 에피소드입니다. 조금이라도 설명하려면 스포일러가 되니 보는 즐거움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1위
Blink
시즌 3 10화
IMDB 평점 9.8
줄거리 : 어느 날 폐가에 놀러 갔다가 친구를 잃은 샐리 스패로우. 놀랍게도 사라진 친구는 과거로 떨어져 현재는 이미 자연사한 후였다. 친구 동생을 만나러 간 샐리는 웬 남자가 남긴 영상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자기와 대화하는 듯한 녹화 동영상에 놀라는 샐리. 그 와중에 그녀를 쫓는 생명체들. 그들의 정체는 천사 석상처럼 생긴 외계인이었는데...
IMDB 에피소드 평점 1위이자, 방영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최고의 닥터후 에피소드'를 꼽을 때 언제나 나오는 Blink 에피소드입니다. 명에피 제조기 모팻이 쓴 에피소드기도 한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쓴 에피소드라고 합니다. 허겁지겁 쓴 에피소드가 역사에 남을 에피소드가 되다니, 모팻 당신은 대체…….
이 에피소드는 우는 천사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석상 형태를 취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우는 천사는 다른 사람들을 과거로 보내 그 사람이 살아야 했을 미래의 에너지를 흡수합니다. 우는 천사는 누가 보고 있을 때는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보는 일을 막기 위해 손으로 눈을 가립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는 모습과 비슷해서 우는 천사라고 불립니다. 우는 천사를 맞닥뜨렸을 때 눈을 깜빡이면 당합니다. 옛날 홍콩 영화에서 강시 앞에서 숨을 쉬면 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무섭기도 하거니와 시간 여행이 보여줄 수 있는 센스를 최고조로 발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샐리는 닥터가 남긴 영상을 보면서 대본을 남기고, 나중에 그 대본을 닥터에게 전달합니다. 닥터는 훗날 그 대본을 보고 영상을 찍어 샐리에게 남깁니다. 옛날 녹화한 영상이 지금 대화하듯이 말이 통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습니다. 역시 모팻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닥터후 최고 에피소드 목록 5편 중 3편이 모팻 작품이군요. 거기다 IMDB 에피소드 평점 상위권은 모팻 천지입니다. 모팻, 당신이 짱 먹으세요.
참고. 이 에피소드 주인공 샐리 스패로우를 맡은 캐리 멀리건은 훗날 미국으로 가서 할리우드 배우가 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도 나왔습니다. 시즌 3가 나올 때만 해도 많은 닥덕후들이 샐리가 새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쁘잖아요. 그나저나 위대한 개츠비를 본 팬들이 닥터후 팬이 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밖에도
Turn Left(시즌 4 11화) : 러셀 에피소드. 아까 말했듯이 아주 어두운 에피소드. 잔인하거나 야하지는 않지만 음울하고 씁쓸함. 어린이가 봐도 되나 의심이 될 정도.
The Girl in The Fireplace(시즌 2 4화) : 모팻 에피소드. 모팻답게 감동과 공상과학적인 상상이 돋보임.
Listen(시즌 8 4화) : 모팻 에피소드. 어떻게 보면 Midnight보다 더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오는 에피소드.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보다가 기뻐서 실신할 수도 있음.
Vincent and The Doctor(시즌 5 10화) : 고흐와 만나는 에피소드. 아름답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명성이 높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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