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글쓰기와 닥터후, 엑셀, 통계학, 무료프로그램 배우기를 좋아하는 청년백수의 블로그
레드 (1)
<추억의게임> 포켓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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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구아나를 키웠습니다. 암수 한 쌍을 사들였는데 쌀쌀한 가을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죠. 생각해 보면 쓰다듬을 수 있는 동물을 키울 걸 그랬습니다. 적어도 키우는 저는 쓸쓸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면 튼튼한 동물을 키우는 건 어떨까요? 친구와 열심히 키운 다음 친구네 동물과 싸우게 시키는 겁니다.

 

미친 소리 같죠. 하지만 90년대부터는 미친 소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의 로망이 되었죠. 바로 포켓몬스터 말입니다. 두 사람이 싸웁니다. 싸우는 무기는 주먹이 아닙니다. 주머니에 넣은 공이죠. 공을 던지면 그 공에서 괴생명체가 뛰어나옵니다. 이들이 주머니 속의 괴물, 포켓몬스터입니다. 포켓몬스터, 일명 포켓몬은 서로 자신만의 기술을 써 가면서 다른 포켓몬들과 싸우죠. 포켓몬마다 다양한 특성과 기술이 있어서 머리를 쓰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불꽃 타입 포켓몬은 물 기술에 약합니다. 그러니 적에게 불꽃 포켓몬이 많다면 물을 쓰는 포켓몬으로 상대해야겠죠. 접근은 쉽되 마스터는 어렵게 하라. 포켓몬은 이 게임계의 지상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포켓몬은 대부분 휴대용 오락기로 나오죠. 요즘은 닌텐도 3DS로 나온다는군요. 하지만 저희 세대 포켓몬은 오락기가 아니라 컴퓨터에서 나왔습니다. 때는 초등학생 무렵, 컴퓨터 시간이었습니다. 컴퓨터 실습이 다 그렇듯이 학생들은 과제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선생 말을 들으면 다행이죠. 모두 선생이 강의에 정신이 팔린 사이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모니터가 참 불편했어요. 그냥 책상 위에 올리면 되는데 왜 굳이 책상 속에 넣었을까요? 그 덕분에 우리는 고개를 거북이처럼 숙여서 컴퓨터를 했습니다. 모니터도 웬 투명 유리 너머로 봐야 했고요. 시력이 나빠질까 봐 그딴 식으로 만든 것 같은데, 척추측만증과 목 디스크는 안중에도 없었나 봅니다. 아무튼 학교 컴퓨터를 켠 다음 딴 짓을 벌였습니다. 딴 짓은 학교 컴퓨터 시간 속 정언명령이었거든요. 누구는 지뢰를 찾고 누구는 벅스뮤직에서 공짜로 음악을 듣고 누구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은 포켓몬을 켰습니다. 처음엔 포켓몬을 실행하는 방법조차 미스터리였습니다. 아는 형, 아는 친구한테 묻고 물어서 겨우 작동했죠. 그때는 에뮬레이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요. 에뮬레이터뿐 아니라 게임보이도 생소하던 시기였습니다. 롬파일을 에뮬레이터에 놓고 실행하면, 메인 화면이 뜹니다. 오박사가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설명합니다. 하지만 뭐 알아듣습니까? 당시 학교 컴퓨터실 포켓몬은 대부분 일본어였습니다. 영어도 잘 모르는 판에 일본어 문자는 웬 꼬부랑글씨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눌렀습니다. 마구 눌렀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태초마을에 집이 넷인 건 천운이었습니다. 집이 열 채만 되었어도 어디에 들어가나 헤맸을 테니까요. 오박사네 연구실에 가서 시작 포켓몬을 고르고 나옵니다. 그리고 떠납니다. 풀밭에 들어가서 좀 걸으면 다른 포켓몬이 뛰쳐나옵니다. 싸웁니다. 기술 특성이고 PP고 몰랐습니다. 그냥 스페이스바를 연타했죠. 오로지 단 하나, 숫자로 보이는 레벨만이 우리에게는 포켓몬 강함의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담임이 자유시간을 주면 컴퓨터실은 스페이스바 두들기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저장하는 법은 당연히 몰랐습니다. 컴퓨터실에 들어갈 때마다 늘 처음이었죠. 오박사네 집에 가서 포켓몬을 고르고, 풀밭을 돌아다니다 싸우고. 진행이라곤 없었지만 우리는 그런 플레이조차 입을 헤 벌리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인터넷의 힘을 빌렸습니다. 그나마 영문판을 알게 되면서 일이 풀렸죠. 최소한 YES, NO, SAVE 정도는 알았으니까요. 야후 코리아나 다음에 검색하면(그때 네이버는 지식인 서비스를 갓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포켓몬 공략 사이트가 많았습니다. 그 루트대로 갔죠. 치트키도 알아내서 잘 썼습니다. 치트 메뉴를 켜고 이상한 8진법인지 16진법 숫자를 입력하면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그 치트로 이상한 사탕을 마구 얻었죠. 이상한 사탕을 포켓몬에게 먹이면 포켓몬은 레벨이 올랐습니다. 너무 올려서 그만 포켓몬이 제 말을 듣지 않았죠. 말은 듣지 않아도 아주 강력해서 모든 체육관을 무리 없이 깼습니다. 결국 저는 스토리는 하나도 즐기지 않은 셈이죠.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그래도 레드 버전을 처음으로 클리어한 날에는 여운이 깊었습니다. 제가 가진 포켓몬 목록이 좌르륵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제 캐릭터가 떡하니 기록되었죠.

 

포켓몬은 RPG입니다. 엄연히 스토리를 음미하는 게임이죠. 따라서 제가 포켓몬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식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는 치트를 써서 모든 난관을 공짜로 돌파했으니까요. 영어를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포켓몬스터 골드 버전을 본 순간 제 마음속 불꽃은 살아났습니다. 포켓몬에 후속작이 있다니! 신기하죠. 어린 시절에는 후속작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으니. 아무튼 골드도 치트를 쓰고 공략을 보면서 진행했습니다. 포켓몬 숫자는 더욱 늘었죠. 게임은 흑백시절과 작별하고 컬러를 탑재했습니다. 이제 물 포켓몬이 쏘는 물대포가 파란색이고 불 포켓몬이 날리는 불꽃이 빨간색이었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골드버전을 깨고 나면 전작 지방에 다시 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추억 돋습니까. 배를 타고 전작 배경인 관동지방에 도착했을 때의 그 추억이란. 물론 용량 문제로 모든 관동지방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면 아주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골드 마지막의 마지막은 전작 주인공과 벌이는 전투죠. “…….” 다음 시작되는 전투. 그리고 똑같이 …….”를 남기며 사라지는 전작 주인공.

 

훗날 골드가 한글로 나오면서(합법 한글화는 아니지만) 스토리를 더 잘 알았습니다. 아 참, 골드 버전을 이야기하려면 밀탱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아마 세 번째 체육관 관장이 밀탱크를 꺼냈을 겁니다. 밀탱크는 너무 강력했습니다. 때려도 아파하지 않았고 한 번 부딪치면 이쪽 포켓몬들이 나가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위급할 때 혼자서 체력까지 채워 버렸죠. 아마 골드 하면서 거기가 제일 힘들었을 겁니다. 물론 치트를 쓰지 않는 한에서 말이죠. 치트를 쓰지 않으면 ‘XX는 눈앞이 깜깜해졌다!’를 자주 보게 될 겁니다.

 

포켓몬, 포켓몬, 포켓몬! 그때 컴퓨터 보급과 인터넷 소통량 부족을 고려하면 포켓몬의 인기는 지금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에 못지않았습니다. SBS에서 포켓몬 애니메이션을 방송했죠. 모든 애들이 봤을 겁니다. 포켓몬 빵도 나왔죠. 빵마다 포켓몬 스티커가 들었는데 아이들은 아버지 세대가 우표와 병뚜껑을 모으듯 스티커를 모았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스티커를 물물교환하면서 시장경제의 발달을 간접 체험했죠. 아이들이 스티커만 빼고 빵은 버리는 바람에 평일 저녁 뉴스에서 보도까지 했습니다. 아쉬운 쪽은 스티커가 아니라 포켓몬을 방영한 SBS였습니다. SBS는 늘 포켓몬을 후반에 끊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어린이들은 지우가 리그에서 이기는지 지는지를 알 수 없었죠.

 

사실 지금도 포켓몬을 하고 싶습니다. 일부 마니아들처럼 기술표를 줄줄이 외우거나 개체치인지 뭔지를 알려고 데이터를 뜯는 짓은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포켓몬은 볼 때마다 흥미를 돋웁니다. 아까 말했지만 포켓몬은 RPG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줄거리는 단순하죠. 포켓몬을 키워서, 이기고, 모험을 떠나고, 모든 지방을 돌아보면서 성숙해져라. RPG의 가치가 모험과 여행에 있다면 포켓몬은 거의 완벽한 RPG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 포켓몬은 기술적으로도 발달했죠. 포켓몬들이 삼차원 그래픽이 되어 움직이고, 터치펜으로 포켓몬을 만지고 온라인으로 다른 사람과 포켓몬 대전을 벌이니까요. 다만 닌텐도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방이 넓은 것도 좋고 다양한 포켓몬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정말 여행과 모험을 떠난다는 기분이 들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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