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명사]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
오후 두 시.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식곤증과 싸우는 시각. 그러나 트수들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 어느 시간에든 방송을 볼 수 있다. 특히 두 시쯤 되어 방송을 켜는 한 여성 스트리머 방송은 트수들에게 인기가 많다. 닉네임부터 시청자들에게 질문하는 듯한 그녀는 바로 ‘소풍왔니’다.
소풍왔니도 많은 트위치 스트리머처럼 아프리카TV를 탈출해 성공적으로 트위치에 자리잡은 방송인이다. 소풍왔니는 아프리카 시절부터 신인상을 받는 등,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젊은 혈기를 보여주었다. 다만 본인은 신인상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동영상을 매우 싫어하며, 스트리머가 싫어하는 건 시청자들이 좋아한다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시청자들은 그 영상을 매우 좋아한다.
다만 소풍왔니는 리그 오브 레전드 방송으로 유명세를 얻은 BJ(이제 이 단어를 쓰기가 어색하다)여서 나와는 관련이 없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 흥미가 없는 나는 소풍왔니가 옷 안 벗고 욕 안 하는, 조금 희귀한 여성 BJ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풍왔니가 게임하면서 보여준 발랄한 에너지와 백수스러운 인상은 감명이 깊었다. 그 덕분에 트위치를 떠돌던 내가, 혹시나 하며 소풍왔니를 다시 찾았는지도 모른다.
소풍왔니는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의 주인공처럼 주황색 모포를 머리에 덮고 게임한다. 방음부스 안에서 어머님이 조리해준 식사(시청자들은 사식이라 부른다)를 받아먹는다. 누누라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고양이가 스트리머보다 귀엽다. 세상 스트리머를 ‘게임 잘 하는 맛에 보는 사람’과 ‘게임 못 하는 맛에 보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소풍왔니는 후자에 속한다. 줄거리와 게임 포인트를 잘 못 잡는 데다 피지컬도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실력 덕분에 오늘도 트수들은 그녀의 방송을 보며 메모장을 켠다(욕을 하다간 트러블에 휘말릴 수 있으니 메모장에 대신 비난한다는 뜻. 설명충 같다고? 모든 인터넷 인구가 우리처럼 트위치 당직사관이 아니다).
그런데 소풍왔니에게는 부족한 게임실력을 메꾸다 못해 상회하는 매력이 있다. 모델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천사처럼 성품이 곱지도 않은 소풍왔니는, 어찌 보면 순수한 마음과 리액션으로 게임을 이어나간다. 트수들은 ‘소풍왔니가 하는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하는 소풍왔니’를 보는 셈이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이 점은 정말 칭찬하고 싶다. 작가들도 ‘A가 쓴 B라는 작품’보다는 ‘B를 쓴 A’로 남고 싶으니까. 소풍왔니가 어떤 게임을 할 때만 트수들이 온다면 트수들은 그 게임 팬이지 소풍왔니 팬이 아니다. 그러나 트수들은 소풍왔니가 무슨 게임을 하든 넘어지고 깨지는 모습에 박수를 친다(물론 메모장도 켠다).
VR 공포게임을 하다 눈물콧물 다 흘리는 소풍왔니는 놀려먹기 좋은 조카나 사촌 같다. 또 진지한 게임을 하며 눈을 크게 뜨는 소풍왔니는 한두 살 어린 후배 같다. 또 어쩌다 게임을 캐리해서 신나하는 소풍왔니는 막역한 친구 같다. 어느 쪽이든 트수들은 좋아한다. 집은커녕 방도 제대로 못 나가는 나 같은 트수들에게 소풍왔니는 말 그대로 모니터 속에서나마 상쾌한 야외를 체험시켜주는 소풍 같은 존재다.
P.S. 옥자 합방은 언제 할까? 그때 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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