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찬범의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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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방영 에피소드 (1)
미방영 에피소드 <Shada>가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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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한국에서도 마이너한 인기를 가진 공상과학 소설입니다. 평범한 영국인 아서 덴트가 겪는 괴상한 모험을 다룬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영화판에서 아서 덴트는 드라마 <셜록>에서 왓슨을 맡은 마틴 프리먼이 연기했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더글러스 애덤스라는 영국 작가가 썼습니다. 더크 젠틀리를 쓰기도 했는데 넷플릭스가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더글러스 애덤스(사진 : John Johnson - https://www.flickr.com/people/92354342@N00)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더글러스 애덤스는 닥터후 각본에 참여한 전적이 있습니다. 1979년 방송한 4대 닥터 에피소드 <City of Death>가 더글라스 애덤스 작품입니다(정확히는 공동저작).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한 이 4부작은 닥터후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현재까지도 4대 닥터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히고 있습니다.

 

 

 

따뜻한 파리 경치와 더글러스 애덤스 특유의 시니컬한 스토리가 조화를 이루는 City of Death, 2017년 시청자 눈에는 별로일지도(사진 : BBC)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도 <City of Death>와 같은 시즌에 방송할 예정이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1980년 초에 방송했겠죠. 그 에피소드는 무려 6부작이었고 시즌 마지막을 장식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에피소드는 영영 방송하지 못했습니다. 그 제목은 <Shada>입니다.

 

 

<Shada>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닥터와 로마나는 1979년 캠브리지로 갑니다.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는 크로노티스를 만나기 위해서죠. 크로노티스는 사실 은퇴한 타임로드로 지구에서 교수로 위장해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로노티스를 찾는 쪽은 닥터뿐이 아니었습니다. 과학자 스카그라는 크로노티스를 추적해 크로노티스가 소유한 책 한 권을 훔칩니다. 그 책이 있어야 셰이다(Shada)라는 행성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셰이다 행성은 타임로드가 감옥으로 쓰던 행성으로, 스카그라는 셰이다에 갇힌 동료 살리아빈을 구출하기 위해 책을 훔친 것이었습니다. 스카그라는 책을 훔치고 로마나를 납치한 다음 닥터의 타디스마저 빼앗아 셰이다로 향합니다. 살리아빈은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풀려난다면 온 우주가 위험하게 됩니다. 닥터는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요?

 

 

 

 

실제 Shada 촬영분. 4대 닥터(중앙) 뒤로 옛날 타디스가 보인다. 클래식 닥터후는 촬영을 대충 한 탓인지 배우가 컴컴한 타디스 모형에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현재는 타디스 안에 패널을 세우거나 특수효과를 주어서 훨씬 자연스럽다.

 

 

 

만약 방송되었다면 <City of Death>를 넘을 최고의 에피소드가 될 수 있던 <Shada>를 시청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1979년 영국을 휩쓴 인플레이션과 파업 사태로 촬영이 도중에 끊기고 말았거든요. 이후 재촬영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1980 6월 에피소드 제작은 공식적으로 취소됩니다.

 

 

 

닥터가 건물로 위장한 악당 타디스를 타고 자기 타디스를 되찾는 장면. 악당의 타디스가 상점처럼 보인다. 혹자는 이를 두고 시즌 9의 결말이 이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스티븐 모팻, 미방영 에피소드마저 오마쥬하는 당신은 도대체...

 

 

 

이때 찍은 촬영분 일부는 1983년 빛을 봅니다. 1983 BBC는 닥터후 20주년을 맞아서 <The Five Doctors>라는 스페셜 에피소드를 만듭니다. 다섯 닥터가 모두 모이는 에피소드지만 4대 닥터를 연기한 톰 베이커는 출연을 거절했습니다. 에피소드에서 악당이 다섯 닥터를 모두 납치해 공간에 가두는데, 4대 닥터는 납치 도중 시공간의 미아가 되어 버려서 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초반 모습은 보여야 했기 때문에 4대 닥터는 Shada 촬영분으로 나타납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닥터와 로마나가 뱃놀이를 즐기는 장면이죠.

 

 

1992 BBC는 공식적으로 Shada VHS로 출시합니다. 이미 촬영한 분량을 대본대로 배치한 다음 빈 공간은 톰 베이커의 내레이션을 곁들인 채로요. 이때 VHS를 구매하면 실제 대본을 부록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2013년에는 DVD가 출시되었고요.

 

 

 

 

Shada VHS와 DVD. 영어고자인 나로서는 닥터후 DVD를 사보았자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래도 소장용으로 하나만 구하고 싶은데 지갑은 오늘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린다

 

 

조그마한 틈새라도 보이면 달려들어 쪽쪽 빨아먹는 오디오 제작사 빅 피니시도 Shada 같은 먹잇감을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2003년 빅 피니시와 BBC는 닥터후 40주년을 맞아 Shada를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합니다. 주인공은 4대 닥터에서 8대 닥터로 바꾸었고 따라서 설정도 조금 달라졌지만 8대 닥터를 연기한 폴 맥간과 로마나를 맡은 랄라 워드가 더빙했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것 같지만 검색을 해 보니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품질은 PPT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목소리로만 만족해야 할 수준이라고 하네요. 이후 빅 피니시는 Shada를 오디오 드라마로 출시합니다.

 

 

 

TV 극장판 한 편 출연으로 만족해야 했던 8대 닥터. 이렇게라도 오디오 드라마라도 활약을 하는 데 성공했다. 빅 피니시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이 TV로 볼 수 없는 스토리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갑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설정을 쪽쪽 빨아먹는 것은 별로다.

 

 

 

내레이션으로,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오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진 Shada는 마침내 BBC의 손에서 정식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바로 며칠 전 닥터후 유튜브 계정이 예고편을 업로드 했습니다. 이번 Shada 11월에 블루레이와 DVD, 아이튠즈로 발매될 예정입니다. 촬영분은 디지털 리마스터를 거치고 미촬영분은 올 컬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며 톰 베이커와 랄라 워드가 더빙하고 스틸북까지 판매한다고 합니다. 38년 전에 촬영 중단된 드라마를 다시 만들다니. 저도 닥터후 팬이지만 조금 무섭(?)군요.

 

 

 

 

마침내 BBC에서 공개한 Shada 트레일러. 목마른 닥터후 팬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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