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글에는 크리스마스 스페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닥터후 크리스마스 스페셜이 방송되었습니다. 12대 닥터를 떠나보내고 13대 닥터를 맞이하는 중요한 스페셜이었습니다. 2010년부터 시작된 스티븐 모팻의 시대가 끝나고 크리스 칩널이라는 새로운 선장이 닥터후의 조종간을 잡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시리즈 최초로 조디 휘태커가 여성 닥터를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조금 심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고편만 보면 12대 닥터가 재생성 직전 펼치는 마지막 모험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꽤나 조용하고 은은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보면서 언제 팡팡 터지나, 언제 클라이막스로 가나,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오히려 <Twice Upon a Time>은 스티븐 모팻이 지금껏 자기가 써온 각본을 근본부터 뒤집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그동안 지구, 우주를 멸망시키거나 닥터 본인을 위협하는 적들과 싸워온 닥터. 닥터는 유리 인간을 만나 너희 계획이 뭐든 간에 멈추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유리 인간의 계획은 악의 계획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닥터 본인도 ‘악의 계획이 아니면 어쩌란 말이냐’면서 당황합니다.
스티븐 모팻이 들려주는 주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이 에피소드에 악당은 등장하지 않습니다(에피소드 극초반에 회상으로 나오는 사이버맨은 제외). 닥터후 에피소드라면 으레 나오는, 무고한 시민이 레이저를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도 없습니다. 마크 게티스가 연기한, 죽을 예정이던 캡틴은 닥터가 해결하지도 않았는데 살아남습니다. 세상은 죽고 죽이는 외계인들과 음모로 가득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제입니다. 1차대전 전장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본 두 닥터는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1대 닥터는 재생성을 두려워했지만 용기를 얻습니다. 12대 닥터는 구하고 또 구하는 삶이 지겨워졌지만 한 번만 더 믿기로 합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스페셜은 긴장도 스릴도 없습니다. 그 빈자리를 잔잔한 감동이 채웁니다.
1대 닥터
사실 아무도 1대 닥터가 닥터후에, 그것도 옛날 방영분에서 짜깁기한 모습이 아니라 실제 배우로 등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2013년 닥터후 5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An Adventure in Space and Time>은 닥터후 제작기를 다뤘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데이비드 브래들리가 1대 닥터 배우인 윌리엄 하트넬 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1대 닥터를 연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니만큼 데이비드 브래들리는 윌리엄 하트넬과 다르게 생기고 목소리도 다릅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 나온 모습 정도면 배우도 제작진도 아주 노력했다고 인정할 만합니다. 복장은 물론이고 옷매무새를 잡는 특유의 포즈도 완벽 재현했습니다.
그러나 1대 닥터의 차별적인 발언은 조금 너무하다 싶습니다. 1대 닥터가 고집스러운 노인인 건 사실입니다. 1대 닥터가 1960년대에 만들어진 캐릭터인 것도 사실입니다만 제가 아는 1대 닥터는 여성차별 발언은 툭툭 뱉는 외계인은 아니었습니다. 안 그래도 시즌 10이 불필요한 정치적 올바름(PC)로 논란이 되었는데 굳이 1대 닥터로 쐐기를 박아야 했나 궁금합니다. 시즌 10을 볼 때만 해도 방송국이나 다른 임원 탓을 했으면 했지 모팻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번 크리스마스 에피소드 이후로는 모팻도 혐의를 피할 수 없겠습니다. 어차피 떠나겠지만요.
잘 가요, 피터 카팔디
12대 닥터가 재생성하기 전 독백하는 장면은 좋은 형용사가 부족할 정도로 환상적입니다. 비록 반쯤은 체념하듯이 재생성을 결정하지만, 12대 닥터는 그 와중에도 유머와 진실을 잊지 않습니다. 처음 ‘비겁해지지도 악랄해지지도 마라’는 메시지는 시즌 9 마지막에 클라라한테 남긴 자신의 좌우명입니다. 한번 말한 걸 또 말해서 조금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게다가 배까지 먹지 말라고 하다니요. 신선하고 차가운 배가 얼마나 맛있는데(삭제된 10대 닥터 장면 중에는 배를 먹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닥터는 그리고 ‘아이들은 가끔 너의 이름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 듣고는 엥? 싶었는데 곱씹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닥터후는 어린이들도 보는 드라마고, 11대 닥터 초반은 거의 동화나 다름이 없었죠. 이따금 닥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먼 존재임이 드라마 중간 중간 드러납니다. 이 ‘어린이’ 발언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시절이거나 순수한 나이에 사는 사람만이, 그것도 가끔 닥터의 본명을 ‘듣는다’는 말은 정말 동화책에 써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Doctor, I let you go.
12대 닥터가 남긴 마지막 말.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요. 시즌 10 마지막에 사이버맨이 쏘는 광선에 맞고 쓰러진 닥터는 자기 자신에게 ‘Let it go.’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고 모두 ‘그만 이 삶을 놔버려’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점에서 보자면 12대 닥터의 유언(?)은 자기한테 하는 말이라면 ‘이제 그만하자.’, 다음 닥터에게 하는 말이라면 ‘이제 네 차례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재생성 장면은 기대보다 스케일이 작았습니다. 적어도 노란 빛이 눈부시게 뿜어나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보다는 주황색 번개가 뻗어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 보고는 ‘뭐가 이리 느려’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슬로우 모션이었습니다. 빛을 더 낸다고 특수효과 비용이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좀 화려한 재생성을 보여주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3대 닥터가 눈뜨다
12대 닥터의 마지막 장면은 치켜뜬 눈이었습니다. 12대 닥터가 시청자들에게 처음 모습을 보인 2013년 50주년 에피소드와 비슷합니다. 수미상관법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는 역시 10대 닥터 재생성처럼 피터 카팔디의 얼굴이 조디 휘태커의 얼굴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눈가만 변하는 모습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13대 닥터가 조디 휘태커라는 사실은 팬덤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겠지만,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다음 닥터를 모른다고 가정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여성 닥터라는 개념을 차근차근 보여주려 재생성 장면을 고심해서 계획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13대 닥터의 얼굴은 바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일단 변한 눈가를 보여서 시청자를 놀라게 하고, 뒷모습으로 궁금증을 유발한 다음,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게 했습니다. 뒤이어 얼굴을 확인한 닥터의 첫 마디는 ‘Brilliant’. 거기에 때 묻지 않은 미소를 짓습니다.
이 미소를 보고 여성 닥터에 대해 안심한 시청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물론 지금도 여성 닥터는 불안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저 미소는 일단 합격입니다. 속된 말로 빙구(?) 같은 미소를 보니 4대 닥터가 짓던 미소가 떠오릅니다. 재생성 후 반응은 확실히 ‘여성’을 강조하지도 않고요.
추락하는 닥터에는 날개가 없다
13대 닥터가 타디스 버튼을 누르자마자 타디스는 요동칩니다. 닥터는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마는데, 아마 중력이 고장난 듯합니다. 닥터는 중력에 이끌려 질질 내려갑니다. 조종간을 붙잡아 보지만 조종간마저 떨어지면서 닥터는 밖으로 날아갑니다. 타디스 문이 활짝 열린 장면 때문인지 타디스가 일부러 닥터를 뱉어낸(?) 것 같습니다. 유튜브 댓글을 보니 ‘타디스도 닥터를 싫어한다.’라든가 외국판 김여사 드립이 있긴 합니다.
타디스가 왜 닥터를 떨쳐냈는지는 다음 시즌에서 밝혀지겠죠. 일단 닥터는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니까요. 10대 닥터는 재생성 직후 손이 잘렸음에도 재생성 후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손이 다시 자라났습니다. 어쩌면 13대 닥터도 재생성 직후에 추락했으니까 맨땅에 충돌해도 어찌저찌 살아남지 않을까요.
크리스 칩널은 닥터후를 옴니버스 방식이 아닌 연결 방식으로 제작하겠다 밝힌 바 있습니다. 만약 정말 칩널이 닥터후를 그렇게 만든다면, 초반은 타디스 없이 지구에 사는 닥터를 그릴 것 같습니다. 3대 닥터도 역사에 간섭했다는 죄로 타디스 조종법을 기억에서 삭제당하고 지구로 유배당했습니다. 3대 닥터는 초반에 UNIT에서 외계인을 퇴치하는 생활을 보냈는데, 13대 닥터도 비슷한 삶을 살게 될까요?
결론적으로 <Twice Upon a Time>은 모팻이 쓴 덜 모팻스러운 에피소드이자, 크리스마스라는 주제로 부족한 재미를 보충하고도 남은 에피소드이자, 오랜만에 닥터후를 보면서 심장이 터질 듯한 느낌을 느끼게 해준 에피소드이자, 다음이 너무나 기대되는 에피소드입니다.